'친일 나무'
[조선일보 <만물상> 2019. 6. 8]
나팔꽃, 분꽃, 달맞이꽃은 이름만으로 정겹다. 먼 조상 대대로 고향 집 길모퉁이를 지켜온 것 같다. 그러나 착각이다. 각각 인도, 중미, 남미가 원산지다. 들녘에 흔한 개망초와 토끼풀, 도시에 흔한 서양민들레도 국내 정착한 외래종이다. 이런 '귀화 식물'이 국내에 400종이 넘는다. 나무 국적(國籍)을 따져 뭐 하나. 생태계에 문제 일으키지 않고 잘 어울려 살아가면 그게 우리 꽃이다.
▶그런데도 식물 국적 시비가 종종 벌어진다. 벚꽃이 대표적이다. 벚꽃이 일본 국화(國花)라는 인식 때문에 창경궁에 있던 벚나무가 대거 잘리거나 이식 됐다. 일본엔 국화가 없고 굳이 따지면 왕실 상징인 국화(菊花)라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다. 한·일 식물학자들은 지난 수십 년간 왕벚나무의 원산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논쟁은 허망하게 끝났다. 국립수목원이 한·일 왕벚나무의 전체 유전체(게놈)를 해독해보니 "두 나무의 종이 아예 다르다"는 사실이 지난해 밝혀졌다.
▶이번엔 향나무가 시비에 휘말렸다. 제주도의회가 3일 '일제 식민 잔재 청산 조례안'을 입법 예고했다. 제주교육청은 "교내에 심은 '가이즈카 향나무'는 일제 잔재" "조례안이 통과하면 베어낼 것"이라고 한다. 이 향나무를 교목(校木)으로 지정한 제주도 내 초·중·고가 21곳이다. 교정의 향나무 2157그루가 모조리 잘려나갈 판이다. 대통령이 친일 청산을 요구하니 도로명, 교가(校歌)까지 바꾸고 이제는 식물까지 공격한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대구 달성공원에서 가이즈카 향나무를 기념 식수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작년 발간한 '정신문화연구'에 "가이즈카 향나무에 관한 속설은 대부분 허구"라는 논문을 실었다. 이 향나무의 일본명인 '가이즈카이부키(貝塚伊吹)'가 처음 등장한 게 1928년이어서 "1909년엔 그런 향나무가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1930년 발간된 일본 문헌엔 이토가 심은 향나무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기록도 있다.
▶향나무 원산지는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 여럿이다. 서울 창덕궁과 선농단 등지엔 수령 500년 넘은 향나무가 있다. 반면 삼나무는 일본만이 원산지다. 일제강점기 국내에 들어와 제주도 마을 주변과 논밭, 과수원 등지의 방풍림으로 심어져 제주의 대표적 수종이 됐다. 향나무를 베어내겠다는 논리라면 그 전에 삼나무부터 먼저 베어내야 한다. 제주가 황폐해질 것이다. 이 한심한 코미디를 언제까지 봐야 하나.
<박은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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