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의 굴욕
[문화일보 2015년 10월 13일(火) '오후여담']
은행나무의 학명은 ‘긴쿄(또는 진쿄) 빌로바(Ginkgo biloba)’로, 두 갈래로 갈라진 잎을 가진 은행나무란 뜻이다. 긴쿄라는 이름의 본적이 일본임을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엔 사연이 있다.
일본 역시 한자로는 은행(銀杏)이라고 쓴다. 하지만 읽을 때에는 다르다. 긴쿄·이초(나무)·긴난(열매) 세 가지다. 그런데 17세기 말에 일본을 다녀간 독일인 의사이자 박물학자 엥겔베르트 캠퍼(1651∼1716)가 긴쿄의 철자를 ‘Ginkgo’로 잘못 쓰고 말았다.(이주희 ‘내 이름은 왜’) 제대로 옮기면 ‘Ginkyo’나 ‘Gingko’가 된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던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도 그대로 학명에 반영했다. 동양의 한자어에서 서양의 알파벳으로 표기되는 과정에 이름이 바뀌었으니, 은행나무로선 치욕이다.
예로부터 행단(杏壇)은 학문을 닦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공자가 ‘은행나무 단’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국어사전의 이 풀이와는 다른 주장도 있다. 공자의 행단은 은행나무가 아니라 살구나무였을 수 있다는 추정이다. 근거는 ‘살구나무 행(杏)’이다. 행인(杏仁)이라고 하면 살구의 씨앗을 가리키지만, 행자목(杏子木)이라고 할 경우 은행나무의 목재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기념관이라 할 중국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시 공부(孔府)의 행단 앞에도 작은 살구나무가 있다.(강판권 ‘세상을 바꾼 나무’) 하지만 조선의 행단이라 할 유명 서원(書院)들에는 살구나무 아닌 은행나무가 수백 년씩 자라오고 있다.
한국과 중국에서 은행나무와 살구나무로 서로 다르게 지칭되는 ‘杏’자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게 한다.
서울을 비롯한 도시의 가로수로 은행나무를 많이 심는 것은 공해에 강하기 때문이다. 또 은행잎 속에는 모기 같은 해충을 쫓아주는 플라보노이드와 터페노이드 성분이 들어 있다. 은행 알은 전분과 단백질이 많고 비타민 A, C도 들어 있어 즐겨 먹는다. 문제는, 은행 겉껍질 속의 옻 성분이다. 그래서 구린내와 가려움증을 호소하는 민원이 발생한다. 멀리서 샛노란 잎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가을의 낭만에 젖지만, 은행나무 밑을 지나는 사람들은 악취와 가려움증으로 고통 받는다. 강한 바람이 부는 날이면 은행나무 밑을 지나기가 조심스럽다.
5억 년 DNA를 간직한 은행나무가 이래저래 굴욕을 당하고 있다.(황성규 / 논설위원)
Copyrightⓒ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