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보리교회 외/갈보리교회 이필재목사 설교

성도의 기쁨의 조건

산넘고 물건너 2015. 11. 8. 00:03

                                   성도의 기쁨의 조건 

                                            하박국 3:16~19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박국 선지자를 가리켜 ‘이스라엘 철학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철학적인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철학적인 대답을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 됨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철학적인 질문을 하고, 마지막에 신앙적인 답변을 얻어내는 순서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박국 성경을 읽으면 아주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늘 가지고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의문을 하박국 선지자가 대신해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대리 만족을 주는 말씀이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런 의문을 하나님께 질문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후손의 삶에서 축복관은 율법으로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 축복은 신명기적 축복개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서 살게 됐을 때에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라는 물음에

‘이렇게 살아라.’하고 주신 신앙적 민법이 신명기 성경입니다. 거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세상에서 윤택한 번영을 누리도록 확실하게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반하면 벌을 받게 된다.’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신명기 내용입니다.

이러한 신명기의 화려한 약속은 성경을 읽는 사람이나 설교자나 듣는 사람 모두를 즐겁게 해 줍니다.

보십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네 대적이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길로 너를 치러 왔다가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라."

이와 같이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들입니다. 심지어는

"꾸어줄 지라도 꾸지 아니할 것이며, 머리가 되었지 꼬리가 되지 아니하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게 하지

  아니하리니..."

이런 약속들이입니다. 모두가 좋은 구절로 가득한 약속들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너희가 사는 땅에다 내려 주리니 세계 만민이 너희가 내 백성인 줄을 알

 게 되리라."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박국 시대의 유대 나라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앞의 약속들과는 정 반대였습니다.

'대적들이 쳐 들어오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하박국 1장 6절을 보면 하나님이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유대인을 침략하도록 시키고 있습니다.

5~6절에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점령하리라." 하였습니다.

 갈대아 사람은 아주 호전적 민족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대 나라의 사회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착하게 사는 사람이 더 못사는 사회풍토가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이 철학의 아버지가 되기 된 것입니다.

신명기적 신앙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가는 백성이 무엇 때문에 갈대아 사람들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어야 하는가?  나쁜 짓 안하고 죄 없이 살고자 하는 사람은 왜 못 살아야 하는가?

1:13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

 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이까?"

합리적 질문을 하는 철학의 아버지, 의인의 대변자 하박국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을 쉽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왜 약속한신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까? 설령 우리 아브라함 자손들의 잘못이 있다고 합시다.

 그래도 갈대아 사람들 보다는 낫습니다. 갈대아 사람이 우리 민족을 파멸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모순이 됩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라는 내용입니다.  매우 합리적입니다.

 

제가 21살 신학생 때, 어느 날 교장선생님께서 저를 불렀습니다.

“설교할 줄 아느냐?”/ “예” / “교회를 맡을 수 있겠느냐?” / “… 예” / “그럼 맡아라.”

그래서 신학교 입학 한 달 만에 교회를 맡게 됐습니다. 지금 우리교회가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 홍파복지원 맹인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속한 노회가 평안도 사람들이 중심이 된 「평동노회」였습니다. 평안도 사람들의 말이 셉니다. 그런데 그 교회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는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복지원 원장의 사모님이셨습니다. 평안도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그 권사님과 나하고 둘이서만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고민에 빠집니다. 그분이 얼마나 세게 하는지 나는 옆에서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기도를 옆에서 들어보면 하나님께 마치 남편에게 대하듯 기도합니다.

“아바지, 내래 왔수다.” 막 따지듯 합니다.

“아니 내래 아바지한테 잘못한 게 뭐 있시오? 기치 말라우요. 잘 좀 봐 주구래~”

그 분 남편이 맹인 목사님이십니다.

“내래 맹인 남편 섬기는 것도 힘들어 죽갔는데, 하나님마저 나를 못살게 구시고 그래요.”

21살 어린 전도사는 자기 기도는 못하고 가슴을 벌벌 떨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맞습니다. 저 권사님을 어렵게 하면 저까지 곤란해집니다.”

늘 이런 식이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하나님 왜 우리백성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갈대아 사람을 쳐들어오게 하십니까? 이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신명기적 약속입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이렇게 따지는 것입니다.

 

하박국 성경은 3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에 하박국의 질문이 나오고, 2장에서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정리된 신앙고백으로 끝납니다.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대답에는 우리들이 신앙생활에 너무나 귀에 익은 말씀이 있습니다. 즉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라는 답변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교리적으로 깊이가 있고 또 해석이 어려운 성경이 로마서라고 합니다. 이 로마서는 「하나님 백성 됨의 가치와 정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이 로마서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성경구절이 1장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으므로 우리가 그 복음을 마음으로 믿으면 그 믿는 믿음으로 또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힘이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기록된 바’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디에 기록된 것입니까?  바로 하박국 2장 4절 말씀을 로마서가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박국의 질문에 대답하신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내 형편과 기준을 갖다 대고 따지고 덤벼드는 그런 삶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바국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1장에서 질문을 하고 2장에서 대답을 들은 하박국은 3장에서 정리하면서 <곡조 있는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3장 1장을 보면 ‘시기오 놋에 맞춘 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 ‘시기오 놋에 맞춘 노래’의 <시기오 놋> 이라는 말은 음악적 용어입니다. 경이로운 곡조, 훌륭한 악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3장 19절 마지막을 보면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러므로 이 3장은 전체가 성가대의 찬양곡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혼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고 영장으로 맞춘 노래 즉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경이로운 곡조에 맞추어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부르는 감사와 찬양의 특별순서입니다. 이것으로 하박국 성경은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 찬양을 어떤 환경에서 불렀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6절에 그들의 국민적 분위기가 잘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침략을 위하여 아주 잘 훈련된 갈대아 군사들이 지금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그래서 ‘내 창자가 흔들렸고 내 입술이 떨렸도다.’ - 너무 무서워서 창자가 벌렁벌렁하고 입술이 덜덜 떨렸다고 했습니다.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공산군이 한강 다리를 건너왔다’고 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히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 이제 다 죽는구나! 이러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전쟁의 공포가 기득한 가운데에서도 노래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제 민족의 운명은 매우 비참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지만 이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들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마음으로 초연하게 <영장의 지휘자에 따라 시기오 놋에 맞춘 노래를 부르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신앙적 초점은 무엇입니까?

우리 개인이 아무리 선하게 선하게 살려고 노력을 하여도 피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칩니다. 원인이 내게 있지 아니한 고난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욥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동방에서 욥과 같이 훌륭한 사람이 없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가 만난 고난은 무엇입니까? 인간으로서 당하는 최악의 고난이었습니다. 욥이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이라고들 합니다. 의로운 사람이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외로운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팔려간 노예, 죄목 없는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원인은 그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잘못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믿음이란 무엇이냐?  '거기에서 믿음은 나타난다' 그것입니다.

여기 17절 말씀을 보면, 성경구절 한 절 속에 당시 그들의 육신적인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여섯 가지 종류가 없다는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그들의 생활문화에서 꼭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는 식량입니다. 터키 소아시아 지방을 여행해 보면 무화과나무 밭이 끝도 없습니다. 무화과는 그들의 식량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다는 것은 곧 생활에 제일 소중한 식량이 없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가나안의 몇 가지 특산물 중에 포도는 아주 큰 몫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포도원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수입원을 말하는 것인데 그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 이것은 생활의 필수인 석유가 아직 없던 시절의 기름이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기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밭에 식물이 없으며...’ 어느 나라건 밭의 작물은 기초산업으로 국민의 기초생활의 첫 째 조건입니다. 그런데 지금 흉년이 들어서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 양이 없으며...’ 양은 유목민 생존의 절대적 조건입니다. 그러한 양도 다 없어졌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이것은 약간의 부를 상징합니다. 사람마다 소원하는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가 다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럴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라고 합창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 하박국서는 철학적 질문에 신앙적 대답이요 육신적 현상의 질문에 영적 대답인 것으로, 신앙으로 말하자면 아주 차원 높은 수준의 믿음을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인간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6가지 조건이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기쁨의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신앙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조건들이 다 갖추어 있을 때에도 기쁨과 감사의 찬양을 하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목회하면서 보아온 통계가 있습니다. 교인들이 늘 이런 말을 합니다.

"제가 이 여건만 좋아지면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좋아져도 안합니다.  보십시오. 가난할 때는 십일조를 잘 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니까 액수가 많아져서 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여건이 좋아질수록 신앙생활의 영적인 수준은 감퇴한다는 통계입니다.

"아! 내게 시간만 많으면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싶은데.."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래도 봉사 안 합니다. 사회에서 학교 선생님을 평생을 했는데 주일학교 교사를 좀 하라고 해도 안 합니다. 은행 직원들이 이렇게 많은데 교회 재정부 봉사를 하라고 해도 안 합니다. 가라오케에서는 100점씩 받는데 성가대 봉사는 안 합니다. 여건 좋아질수록 안 합니다. 

우리가 흔히 신앙생활을 영어의 두 가지 단어로 비유합니다. ‘because’ 와 ‘in spite of’라는 단어입니다.

‘because의 신앙’은 무엇 무엇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건강하고 풍성하고 계획한 일이 잘 되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Because’. 'Thank God'

그러면 이런 것들이 다 안 이루어졌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in spite of 신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실패하고 병들고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그러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18절에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쁨의 조건은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 조건 하나로 기뻐할 수 있어야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미국에서 예화로 아주 자주 사용되는 실화가 있습니다.

미시건 주에 <미시건 호>라는 바다같이 아주 넓은 호수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거기에서 큰 배가 침몰하는 해상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사방에서 아우성을 치는 가운데 마침 대학 수영선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23명이 구조되었습니다.  그의 영웅적인 행동과 이름이 여러 신문과 방송에 주요 뉴스로 소개되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난 후,  로스앤젤리스에서 토레이 신부라는 유명한 분의 신앙 강좌가 있었습니다. 그 신부는 대중 설교에서 그 '미시건호 해상사건'을 예화로 들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그 대학생이 노인이 되어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그 노인은 토레이 신부님을 찾아가 자신을 밝혔습니다.

"신부님 제가 바로 그 학생이었습니다. 방금 제 얘기를 하셨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진작 알았으면 소개라도 할 걸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십니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네, 물론입니다.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렇게 언론이 떠들고 내가 누구며 어느 대학의 수영선수라고 소상하게 소개가 됐지만, 그 23명 중 한 사람도 나를 찾아와 감사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실제 LA에서 있었던 얘기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평가해 봅시다. 그때 생명을 구한 23명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은 무엇이었겠습니까? 물론 죽음의 순간에 살아난 것입니다. ‘지갑을 빠뜨렸다.’라든가 ‘내 물건들을 잃어버렸다’와 같은 것들이었겠습니까? 그런 것은 다 무시되고 그 죽음의 순간에 그 청년의 도움으로 내가 살아나와 생명을 유지했다는 그 한 가지만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신앙생활은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한 가지 조건 만으로도 넉넉히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신앙인이어야 한다. 자기가 이런 저런 조건을 붙이고 그것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느냐에 따라 기뻐하거나 실망하는 것이 무슨 신앙이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낮은 차원의 믿음을 ‘because’의 신앙이라 말합니다. 내 소원의 성취가 이루어졌음으로 기뻐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나 높은 차원의 신앙은 ‘in spite of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입니다.  

여러분, 왜 구원만이 성도의 큰 기쁨입니까? 이세상의 기쁨은 상황에 따라 생기고 소멸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매우 기뻤는데 내일이면 그 조건이 없어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불행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구원의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은 사랑할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신앙생활에 3가지 과정이 있다고 말하는데, 1단계가 ‘의문의 시기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인가?’ 이런 의문의 단계로 한참을 갑니다. 그러다가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라는 확신이 왔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달라는’ 신앙단계입니다. 거기에서 한 단계 올라가면 3단계인 성숙단계입니다. ‘내가 무엇을 드릴 것인가?’  축복단계는 3단계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 성취를 위해서 그 필요를 보시고 그것을 위해 축복하는 단계로 이끌게 되어 있습니다.

하박국, 철학의 아버지가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질문 했고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하박국은 “아 우리 모두 <시기오 놋>에 맞추어 노래하자”고 하면서 우리를 성숙한 신앙인의 자리로 이끌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받은 영생으로 인하여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은 구원의 백성이 되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이 자리로 

  나왔나이다. 내 주변에 나를 장악하고 있는 여러 조그만 조건들 때문에 낙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하나님 자녀의 자리에 있다는 이 한 가지 기쁨이 영원할 수 있는 믿음을 우리 모두에게 선물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5년 9월 20일 이필재 목사 주일 예배 설교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