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보리교회 외/갈보리교회 이필재목사 설교

방 하나 빌려주세요

산넘고 물건너 2013. 12. 28. 14:45

방 하나 빌려주세요

누가복음 2:1~7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선진국들은 10년에 한 번씩 인구조사를 합니다. 국가 행정에 절대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점령국 인구 조사를 철저히 했는데 세금과 관계가 있습니다. 유대 나라도 로마의 점령 국가였기 때문에 로마의 카이사르 아우구스도가 인구조사 명령을 내려 호적조사를 한 것입니다. 이 호적조사가 지금과 방법이 조금 다릅니다. 반드시 부모나 조상의 고향으로 가서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간 것은 오늘 말씀에 다윗의 족속이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거 일본도 우리 조선 인구 조사를 해서 사람 한 사람당 세금 얼마씩 내라는 인두 세금을 받아간 일과 똑같은 목적입니다. 이 요셉 가정은 문제가 하나 발생했는데 마리아가 만삭이 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가야 합니다. 나사렛 동네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작은 나라이지만 끝에서 끝입니다. 적어도 며칠은 걸어가야 합니다. 만삭된 여인이 그렇게 먼 길을 걷는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자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아마 도중에 아기를 출산할지도 모르는 위험이 따라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므로 전국에서 별안간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들었습니다. 따라서 그 시골 동네에 숙박시설이 그렇게 준비되어 있지 못할 것은 당연합니다. 어쩌다 허름한 여인숙 하나가 있을까 말까하는 시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집 저집 민박할 곳을 찾아다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면 재미를 보는 사람들이 자연히 생깁니다. 민박하는 주인들이 돈의 액수에 따라서 방을 주고 안줍니다.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어디든지 그런 현상은 다 나타납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의 이 물질관은 세계가 인정합니다. 보통 지독이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지독스러움이 나타나는데 아마 그것이 그들의 성공 이유 중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관계하지 않은 분들은 유대인에 대해서 소문만 들었을 뿐 잘 모릅니다. 저는 유대인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유대인 소유의 아파트 관리매니저를 하면서 고학을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유대인들과 접촉을 많이 한 경험 때문에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물질관이나 성취 의욕, 그리고 그들의 머리는 세계 어느 민족도 따라갈 수 없다는 판단이 상대해 보면 저절로 생겨집니다. 제가 온 세상을 다녀봤지만 이스라엘을 가서 제일 불쾌했습니다. 스케줄이 안식일인 토요일에 통곡의 벽을 가게 되었습니다. 일행 중에 목사님 한 분이 통곡의 벽 사진을 찍다가 걸려서 현장 추방시키겠다고 얼마나 야단을 치는지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곤혹 치른 것은 지금 생각해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무마하느라고 한 시간이나 힘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그러한 자세는 아브라함의 혈통 후손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나머지는 모두 저주의 대상이라는 신학의 기초가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셉은 그 지독스러운 베들레헴 주민들에게 가는 곳마다 배척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방 하나를 얻지 못하고 결국 마구간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여기 마구간은 제가 가보니까 우리나라 문화의 소외양간이나 돼지우리 같은 곳은 아닙니다. 목자들이 양을 지키기 위해서 마련한 불편스럽지만 사람이 잘 수 있는 정도의 헛간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놓고 거기서 양떼들과 함께 지내면서 양떼들을 지키는 것이 유목민의 생활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나라나 똑같은 문화가 있습니다. 임산부들은 특별 보호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 지하철을 타면 노약자나 임신하신 분들은 여기 앉으라고 보호석으로 비워두지 않습니까? 또, 어떤 젊은이들은 거기 앉아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봤는데 줄을 설 때 임신한 사람은 앞자리로 먼저 가라고 안내합니다. 사실 임산부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부흥회를 가서 만난 교인 한명을 기억하는데 처녀였습니다. 저의 딸과 지금도 같은 교회를 나가고 있는데 자기가 비행기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엄마가 비행기 안에서 자기를 낳았다고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항공사로부터 평생 할인해주는 계약증서를 받았고 24살까지는 반값으로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큰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비행기 안에서 아기를 낳으면 비행기 직원들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런 혜택을 주지 않습니까? 출산의 축복을 해주는 문화입니다. 내가 물어봤습니다. “어떡하다가 그렇게 태어나셨나요?” “엄마가 예정일이 많이 남아있어서 안심하고 비행기를 타셨는데 비행기가 흔들리니까 공포감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겨서 나는 모르는데 엄마는 너무 당황하셨을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직접 만나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리아도 충분히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지금 있습니다. 출산한 여인은 어떤 경우에 있든지 어떤 관계이든 상관없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많은 민박의 장소에 어떻게 이 만삭의 여인을 보고 방을 하나 내어주지 않았는지 참 야속한 일입니다. 만삭이 된 여인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산이라는 것은 생명이 생명에서 나오는 일이므로 두 생명이 생명을 걸어야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축복이면서도 최고의 고통 동반이 됩니다. 저는 이민 목회하면서 출산 도우미 역할, 세 번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하다 제가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남편이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이거 어떡하죠?”

“뭐요?”

“아내가 지금 아기를 낳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낳는데 나더러 어떡하란 말입니까?”

“병원으로 옮겨주세요.”

“아니, 남편이 옮기셔야죠.”

“제가 집까지 가려면 한 시간도 더 걸리는데 교통 체증으로 이것을 어떡합니까?”

제게 3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너무 급하다고 해서 제가 빨리 가서 병원으로 옮기는 일을 했는데 그때 경험한 일이 있습니다. 아기를 낳게 되었는데 목사가 운전하고 가니까 좀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마음으로 약간 수치감을 가지게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너무 죽겠으니까 그 수치감도 없어지는가 봅니다. “목사님, 나 지금 죽는 거예요?”

“아니요. 안 죽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다 그렇게 출산했습니다.”

그러면서 가는데 나중에는 못견디겠나봅니다. 병원이 너무 먼데 제 목을 막 잡아당깁니다.

“목사님, 어떡하죠?”

“놓으십시오. 괜찮습니다.”

 

이런 경우 요셉과 마리아는 인생의 가장 난처한 입장이 되었고 초라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에서 많은 사람이 보는 가이드포스트지라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소개한 참 재미있었던 성탄극이라는 실화가 실려졌는데 아주 센세이션을 일으켜서 미국에서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목사들이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이들이 성탄 연극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윌리라는 소년이 여관집 주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배역은 조금 악역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방을 구하러 왔을 때 퉁명스럽게 쫓아내라는 역을 맡았습니다. 한 달 동안 연습하고 드디어 교인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연극을 하게 되었습니다. 온 교인들이 다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요셉과 마리아가 와서 사정을 하는 것입니다.

“여관집 주인님! 방 하나만 빌려주십시오. 제 아내가 지금 출산일이 되었는데 막 아기가 태어날 징조가 보였습니다. 갈 데가 없습니다. 아기를 낳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윌리는 자기 역할을 잘해내지 않습니까?

“빈 방이 어디 있소? 돈 얼마요?”

이런 말을 하면서

“빨리 다른 데 가보쇼.”

막 야단쳐서 처량하게 내쫓아버리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하게 잘해서 요셉과 마리아가 처량하게 한숨 쉬며 돌아설 때 이 윌리는 대본에도 없고 선생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엉뚱한 짓을 해서 연극을 망쳐버렸습니다. 순간적으로 ‘이 많은 교인이 얼마나 나를 나쁜 놈으로 생각할까? 이거 어떡하나? 큰일 났다.’ 그래서 ‘에이! 모르겠다.’ 쫓아가서

“요셉님, 마리아님! 사실은요, 우리 집에 방 얼마든지 있어요. 내 방 드릴 테니 우리 집으로 가요.”

이렇게 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요셉과 마리아 역할 친구는 뭐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어휴, 윌리! 우리는 지금 연극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연극을 다 망쳐버렸지 뭡니까? 온 교인이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의미 있고 가장 좋은 성탄 연극이라고 가이드포스트지가 전국에 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연극하는 어린이들도 요셉과 마리아를 넉넉히 협조할 마음에 감동을 받는데 이 지독스러운 베들레헴의 원주민들은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출산은 가장 안정된 분위기에서 가장 정성스러운 도우미들의 보호를 받으며 가장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메시야 출생 사건이 주는 영적 교훈이 있는데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초림 때나 재림 때나 동질성의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당시 유대 사회는 온 국민의 절대적 소망이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린 상태, 지치고 지친 상태였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난번에 설교할 때 광야에 세례 요한 예언자가 나타나서

“회개하라.”

그랬더니 온 백성이 그에게 다 몰려갔다고 했지 않습니다. 왜 몰려갔습니까? 메시야 기대감 때문에 몰려간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셨나보다.”(라고 하면서)

지금은 재림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자신의 재림 시기에 대하여 천사도 모르는 일이며 도적같이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단 문제 연구가들이 “왜 이단 교주들이 자신들이 재림주라고 말하는 엉터리 소리를 듣고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인가?”를 분석해 봤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심리적 작용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온다고 말씀하셨는데 2천년 동안 오지 않으니까 이 재림에 대한 일종의 과대망상증이 신앙자 가운데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왔다니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해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신앙 성분은 거의 다 광신자들입니다. 초림 예수가 언제 오실지 모르고 무작정 기다린 것과 똑같이 재림 예수도 언제 오실지 모르는 무작정 기다림 속에 지금 우리가 있는 똑같은 동질성 상태!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도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초림은 고난의 종으로 오셨고, 재림은 영광의 주로 구름을 타고 세상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오실 것이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몇 번 나옵니다. 복을 복으로 보지 못하는 불행이 있습니다.

“진주를 개에게 던지지 말라.”

하셨습니다. 개는 진주의 가치를 모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가치관에 있어서 여기 분명히 진주가 있는데 그것을 개한테 집어던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그날 방 하나 빌려드렸다면 그것은 영원한 축복의 가치인데 그 많은 베들레헴 사람들은 그 귀한 하나님의 축복을 다 마구간에 집어 던지고 한 사람도 방을 빌려드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열심히 전도하러 다닙니다.

“예수 믿으십시오. 교회 나오십시오.”

그런데 그 모습이 약간의 사정 분위기로 간절하게 말하잖아요?

“여보시오! 예수 믿으려면 믿고 말라면 마시오!”

이러면서 전도지 주는 사람 있습니까?

“이거 전도지입니다. 예수 믿으십시오. 교회 나가십시오.”

마치 빚진 사람이 채권자에게 사정하는 듯 조심스러운 반응으로 전도합니다. 만약 그때 그 사람이 그 전도지를 받아들였다면 그는 인생 최고의 진리와 가치, 영생을 얻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르니까 90퍼센트는 받지 않거나 아니면 퉁명스럽게 뿌리치고 마지못해 받아들였어도 몇 발자국 가서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고 그냥 가지 않습니까? 밭에 감추인 보화를 예수님이 설교하셨습니다. 어떤 밭에 보화가 있습니다.

“그것을 안 사람은 다른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샀느니라.”

최고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의 행동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것을 희생해도 이것은 내가 가져야 되겠다.”

이것이 진리 발견의 가치 기준이란 말입니다. 베들레헴 주민들이 요셉과 마리아를 몰라보고 결국은 메시야를 마구간에 집어던진 것과 같은 일은 지금도 얼마든지 생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의 복음을 내쫒은 나라들이 세상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복을 받아들인 기독교 국가들은 다 세상에서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들은 복이 있도다.”

그랬는데 복을 보지 못하고 집어던지는 일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은 밥을 얻으러 다니는 거지는 없습니다. 옛날에는 깡통 들고 남의 집 문전에 가서 밥 달라고 많이 했는데 공짜로는 안했습니다. 꼭 노래 한곡을 불렀습니다. 각설이 타령, 품바라고 했는데 그 노래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가사도 은혜롭습니다.

“내 모양은 이래도 내가 병조판서 자제로 팔도감사 마다하고 돈 한 푼에 팔려서 일부러 나섰다.”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마지막 끝나자마자 설교를 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오는 바가지는 동냥이요 들어가는 바가지는 복이로다.”

왜 복 받을 일을 모르고 밥을 안주느냐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복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로다.”

그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최초의 인류 구원 사역자로 정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사람은 내가 복을 줄 것이다. 너를 저주하는 사람은 내가 저주할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대로 되었지 않습니까? 선교사가 무엇입니까? 복을 나눠주러 그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래서 복을 받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 많이 내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헛간에 집어던지기도 하고 복을 두들겨 패서 죽이기도 합니다. 인류에 복을 주시러 오신 예수님은 지금 마구간에 버려진 것입니다. 누구도 그 복을 보지 못하는 불행이 베들레헴에 생긴 것입니다.

 

비가 심하게 쏟아지는 어느 저녁 시간에 나이 많은 노부부가 호텔방을 하나 얻으려고 필라델피아 거리를 부지런히 헤매고 있습니다. 호텔 종업원이 말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앞으로 일주일동안 방 하나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주일동안 미국의 모든 저명인사들이 모이는 대 컨벤션이 열리기 때문에 벌써 6개월 전에 예약이 다 끝났습니다.”

“아, 그렇군요. 사실 나도 그것에 좀 관계가 있어서 예약이 없이 왔더니 이렇게 방 하나를 얻지 못하네요. 내가 10번째 호텔을 찾아왔는데 똑같네요.”

비가 오는 저녁에 난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종업원이 말했습니다.

“손님! 이 밤에, 그 연세에 이 거리의 어느 호텔을 찾아가셔도 방은 얻을 수 없습니다. 저는 호텔 직원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쓰는 누추한 조그만 골방이 있는데 종업원용입니다. 거기서라도 쉬시려면 쉬십시오.”

이 노부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이제 살았다. 고맙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따라가 보니까 정말 협소하고 아주 작은 방이었습니다. 종업원은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손님을 쉬게 하고 자신은 그날 밤 밤샘 근무를 하였습니다. 아침에 그분들은 고맙다고 인사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넉넉하게 숙박비를 지불하려고 돈을 주니까

“아닙니다. 이 호텔의 종업원 규칙에 그런 돈을 받으면 저는 이 일을 못합니다. 고맙지만 저를 위해서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노인 부부는 그 종업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호텔 사장은 참 행복한 사업가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을 직원으로 두었으니 말이요.”

그리고 절대 사양하니 인사만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났습니다. 그 종업원에게 뉴욕에서 초대장과 비행기 표가 배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니까 그 종업원이 꼭 와야 되는 사연이 적혀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업이 찾아갔습니다. 그 종업원이 찾아간 곳은 뉴욕에 있는 맨해튼 중심가에 새로 건축된 최고급 호텔이었습니다. 그 부부가 건축한 호텔입니다. 주인은 그 사람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호텔 업자가 아니요. 그런데 당신 때문에 이 호텔을 지었소. 오늘부터 이 호텔의 사장으로 일 해주시오.”

그 젊은이가 월도프 아스트리아 호텔 초대 사장 조지 벌트입니다. 지금 그 호텔은 전 세계 대통령이나 최고의 재벌들이 가장 많이 예약하는 특급호텔로 특실 하룻밤 숙박비가 50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자신의 초라한 방 하나 제공한 그 사람은 세계 최고 호텔 사장으로 평생 일했고 지금도 그 호텔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합니다. 복이 복인 줄 모르는 사람이 있고, 복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19장에 보면 어느 날 롯이 자기 앞을 지나가는 두 사람을 봤지 않습니까? 누구입니까? 천사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정성으로 대접했는데 신약에 와서 히브리서 13장에 뭐라고 합니까?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그 손님들이 천사였음이 확인하는 신약성경이 나왔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사람이지만 천사 역할이 있습니다. 또 사람이지만 마귀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 한 사람 가운데도 너는 마귀라고 유다에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보내주시는 천사 역할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도 있음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아울러 내가 천사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함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또 내가 될 수 있는 함수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는 천사들이 많이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지금 세상에서 어떤 천사의 역할자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 선택을 하시고 전도 활동을 내보냈을 때 말했습니다. 수련회 시간을 가지고 강의를 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 만약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평안을 빌어주고 만약 그 집이 너의 평안을 받아들이면 복이 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먼지까지 털어버리고 나와라.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그 집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너희들은 그런 영적 권한이 있는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가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져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져버리는 것이요 나를 져버리는 것은 나 보내신 이를 져버리는 것이니라. 가라.”

그러면서 보내셨지 않습니까?

마구간에 버려진 아기 예수! 우리 모두 이번 성탄에도 주님을 내 마음 복판에, 그리고 우리 집 안방에 모셔 들이는 마음의 영접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금년에도 변함없이 저희들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합니다. 초대 크리스마스 때 일어났던 사실을 기억하면서 가장 좋은 곳에 우리 주님을! 이러한 신학에, 그리고 신앙의 기초를 가지고 성탄절을 맞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13년 12월 22일 이필재 목사 주일 예배 설교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