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보리교회 외/갈보리교회 이필재목사 설교

나그네의 인생 결산 [고별 설교]

산넘고 물건너 2014. 1. 5. 13:42

나그네의 인생 결산

창세기 47:7~12

  7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11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12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야곱입니다. 이때 나이가 130세라고 했으니까 인생의 말년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성경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생애가 조명되어 있는 삶이었습니다. 창세기 야곱 스토리를 연구해보면 나의 인생 여정도 알 수가 있고 장래도 알 수가 있는 영적인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2013년 마지막 송년 주일에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야곱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두 가지 회고록을 남기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자신을 “나그네”라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나그네 삶을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브엘세바에서 살다가 에서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바람에 한 집에 동거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방랑의 나그네 길을 떠납니다. 유대 나라 남쪽지방에서 출발해서 북쪽지방을 거쳐 국경을 넘어 하란 땅으로 가서 살게 됩니다. 그 가는 과정에서 야곱은 자기 인생을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인적이 없는 사막의 고달픈 도보 여행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명한 단어 하나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돌베개”라고 하는 말입니다. 들판에서 잠을 자니까 베개같이 생긴 돌멩이 하나를 주어다가 거기에 머리를 대고 잠을 청했기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여러분은 사막 경험이 계실지 궁금합니다. 보통 사막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생각하는데 정반대입니다. “사막은 살아있다”는 작품도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처음 가서 캘리포니아 사막에 그날 온도가 약 40도 가량 되는 현장에 주님의 광야 기도를 생각하면서 기도를 하러 갔습니다. 사막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가시나무만 둥글둥글하게 있는 모래벌판 한 가운데 담요 한 장을 밑에다 깔고 담요 또 한 장은 머리에 뒤집어쓰고 기도를 하는데 솔직하게 기도를 한참 하다가 한두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더 이상은 내가 무서워서 하지 못하겠다는 위험이 왔습니다. 왜냐하면 사막에 웬 짐승들이 그렇게 많이 와있는지 무슨 이상한 소리를 내고 후다닥 내 옆을 지나가기도 하고 슬금슬금 기어오는 것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말을 들었는데 “목사님! 그것은 잡아먹으라고 거기 가서 계신 겁니다. 큰일 날 뻔 하셨습니다. 기도를 하셔서 하나님이 들어주셨습니다.”

나중에 제가 팜스프링에 있는 사막 박물관에 가보니까 그 사막에 살고 있는 맹 독수들을 모두다 박제를 해서 이 사막은 아주 위험하니까 함부로 나가지 말라고 경고장을 다 붙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못보고 그런 곳에 가서 앉아서 기도를 드렸으니 수십리 밖에서도 금방 사람 냄새를 맡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먹잇감이 생겨 금방 모여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사막 경험하고 ‘사막이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느꼈습니다. 방울뱀에서부터 슬금슬금 다가오는데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짐승이 많은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물도 한 방울 구할 수 없고 까닥하면 죽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런 곳에서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를 지켜주시옵소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의 인생 회고를 나그네라고 20년 하란에 가서 살았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에 20년 만에 짐 싸들고 브엘세바로 다시 왔습니다. 지금은 또 다른 나라인 애굽 땅에서 야곱이 살게 된 모습이 오늘 나왔습니다.

“나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베드로전서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했고, 히브리서에는 11장에 하나님의 백성을 “외국인과 나그네로라.”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우리 성가대가 “본향을 향하는 나그네” 찬송을 불러주셨지 않습니까? 이게 아주 훌륭한 나그네 신학의 기초가 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나그네 특징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는데 이 나그네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26장 5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이라.”

이 말은 '떠돌이, 집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곳이 영원한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나그네, 숙박업소라고 생각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항상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즐겨 부르는 가스펠송에 이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 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새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 주 복음 전하리.”

내가 반주도 없이 이렇게 잘 부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을 나그네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선택하자마자 제일 먼저 주신 사명은

“고향집을 떠나라. 나그네가 되라.” 이것이었습니다.

나그네로 만들어버립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이 민족은 계속해서 나그네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 영토 분쟁은 그들이 그 땅을 떠났다가 다시 들어왔기 때문에 생긴 피차 기득권 투쟁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나그네는 짐이 가벼운 사람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 너무 많은 애착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궁극적으로 하늘나라에 가서 살 사람이니까 거기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내가 필요한대로 적응하며 살아가는 삶,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 나그네 삶입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면 내가 현재 사는 것보다 볼 것이 많고 좋은 것이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아! 세상에 이렇게 좋은 데도 있었나?’ 할 정도의 감탄스러운 곳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 살지 않습니다. 잠시 보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여행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너무 여기다 애착을 두지 말고 나그네로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 인간은 100년도 못살면서 10,000년이나 살 것 같은 준비들을 하고 야곱은 그의 간증이 “나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야곱을 살펴보면 야곱은 극단의 이기주의자로 나타납니다. 왜 그가 그렇게 살았는가?

특별히 재산이나 소유권에 대한 돈 귀신 들린 사람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고난스러워졌습니다. 야곱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다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장자에게 주는 아버지의 축복권을 가로채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더니 그 죗값을 자신이 그대로 받았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형들이 팔아먹고 짐승이 물어 죽였다고 거짓말 하는 바람에 20년 동안 요셉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장자인 에서에게 가는 재산권 때문에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았는데 야곱은 그의 재산 모두 나중에 에서에게 빼앗겼습니다. 하란에서 야곱이 돌아온다는 말 듣고 에서가 20년 한을 품고 죽이려고 400명 군대를 거느리고 가지 않습니까? 야곱은 살아남기 위해서 재산을 다 에서에게 헌납합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이때 에서에게 건너간 재산 목록이 나와 있습니다.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약대 30마리,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새끼 나귀 10마리를 에서에게 빼앗겼습니다. 속여서 빼앗았기 때문에 다 빼앗긴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갔더니 외삼촌의 딸 라헬이 너무 예뻐서 7년 봉사 약속하고 라헬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첫날밤 자고 보니 속았다고 했습니다.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다고 했습니다. 속였기 때문에 죗값으로 또 속은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도 속입니다. 야곱이 제일 곤란하고 위험할 때 하나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나는 너를 지킬 것이며 너와 함께 할 것이라.” 하나님은 지켰습니다. 야곱은 약속하고 하나도 안 지켰습니다. “나는 십일조도 할 것이며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겠나이다.” 돌기둥 세워놓고 서원 기도했습니다. 하나도 안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먹을 것조차 없어서 10명의 아들들이 쌀자루 하나씩 들고 애굽에 식량 구하러 왔다가 요셉을 만난 거 아닙니까? 그렇게 살아온 130년을 돌아보니까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가 성공하고 편안하게 잘 살줄 알았는데 그랬더니 정 반대의 고생스러운 삶을 험악하게 보냈다고 자신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문제는 우리 계산대로 안 됩니다. 우리 목회자 세계도 예화거리가 있습니다. 제 주변의 어느 목사님은 아주 지혜롭고 수학 잘하고 빈틈없이 똑똑하신데, 그분은 은퇴하실 날짜만 기다리시는 겁니다.

“아니, 남들은 은퇴를 잘 안하려 하는데 어떻게 은퇴하실 날짜만 기다리시는 겁니까?”

“나는 준비해놓은 것이 많아서 빨리 은퇴하고 싶습니다. 은퇴하면 할 일이 더 많고 은퇴 계획도 잘 해놔서 생활비도 지금보다 배나 더 많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은퇴하면 그때부터 평생 100세까지 살아도 문제없고 세계 여행할 계획도 있다고 계획을 이야기하시는데, 다른 목사들은 그 목사님이 만나면 괜히 맥이 빠집니다. ‘나는 어떡하나? 저분은 저렇게 계획이 잘되어 있는데 나는 하나도 안 되어 있고….’ 걱정스럽고 부러워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퇴준비 잘하시고 은퇴할 날만 기다리셨는데 두 달 남겨놓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준비한 게 뭐가 됩니까? 그래서 저는 그 분을 본 후로 뭐든지 생기면 현장에서 써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야곱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재산도 많고 부인을 넷이나 데리고 있었고, 열두 명 아들에 자손 번영했고, 130세까지 살았으니 장수의 복으로 다 누린 것 같은데

“아닙니다. 다시는 이런 생애 살고 싶지 않습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세상 기준을 따라가면 남은 것은 후회와 죄 뿐입니다. 그토록 머리를 굴려서 속여서 빼앗은 것들이 지금 나에게 주는 것은 후회 밖에 없다는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나그네로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살았습니다. 에서에게 그렇게 나쁜 짓 안했으면 하란으로 안 쫓겨 가는 것인데, 그리고 외삼촌에게 나쁜 짓 안했으면 브엘세바로 안 쫓겨 오는 것인데

“가는 곳마다 머리를 굴려서 이리저리 쫓겨 가면서 험악한 세월을 나그네로 보내었나이다.”

이 집안은 네 명의 부인이 날마다 애정 질투를 했을 것이 분명하고 열두 명 아들들이 엄마 핏줄 따라 패가 되어 싸움 했을 것이 당연합니다. 행한 대로 받는 보응의 삶으로

“아! 나는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다시는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바로 앞에서 회고록을 쓰는 것입니다.

제가 예일 대학에 조금 있었는데 거기 역사학자로 폴 케네디 교수가 아주 유명합니다.

“세상은 죗값대로 된다. 소련이 망한 이유는 과잉 군사비 지출 때문에 망한 것이다. 로마가 망한 것도 그것이다. 미국도 똑같은 길을 가고 있다. 조심하라.” 그렇게 경고했습니다.

 

마지막 나그네는 본향을 향하게 됩니다.

야곱은 그의 험난했던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130세 이후입니다. 마지막이 제일 좋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우리들에게 주는가? 하나님의 백성은 마지막은 약속되어져 있는데 그것이 뭐냐? 본향,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날 때 이미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나는 너를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그래서 그 땅에 다시 돌아왔지 않습니까?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어디에서 살든지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본향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야곱 생애가 우리들에게 영적 조명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죽을 때 유언했습니다.

“그 모든 진리를 깨닫고 나를 이 땅에 묻지 말고 가나안 땅에 묻어주어라. 본향으로 가지고 가라. 내가 거기서 끝까지 살았어야 하는데 속이고 속고 하는 이런 일 때문에 내가 잘못한 거 때문에 이렇게 쫓겨 다니면서 살았다. 그러니 내 이 두개골만이라도 그 본향에 가지고 가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요셉은 또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거니와 너희가 이 땅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갈 때는 내 해골을 메고 갈지라.”

그래서 모세가 출애굽할 때 요셉의 무덤을 파서 그 해골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않습니까?

본향의 의미! “나 가나안 땅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내 중한 짐을 벗어버렸네. 죄 중에 다시 방황할 일 없으니 저 생명 시냇가에 길이 살겠네.” 이게 우리가 가고 있는 삶의 목표입니다.

강원도 양양에 가면 남대천 하류에 있는 국립 수산 진흥원이 있습니다. 매년 10월, 11월에 연어를 수정시킵니다. 부화된 연어 새끼들은 3개월 자란 뒤에 2월말, 3월초에 바다에 방류합니다. 그들은 몸집이 커져서 큰 것은 70cm나 성장해서 북태평양 일대를 약 5년 동안 살다가 어부에게 잡히거나 아니면 다른 물고기에 잡혀먹지 않으면 9월과 12월 사이에 남대천에 다시 돌아옵니다. 그들은 지도도 보지 않고 나침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넓은 태평양에서 어떻게 강원도 양양을 찾아올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마지막에는 다 본향을 찾아갈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외국인 같이 살라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을 붙이고 죽기 싫다 하지 말고 본향을 향한 믿음의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약의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의 모든 설교는 종말론적 교훈입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예수님이 설교하셨지 않습니까? 바울신학은 어떻습니까?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내 인생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는 그 인생의 마지막 본향의 목표를 향해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야곱은 이 세상에 너무 많은 가치를 두다가 그렇게 살려면 이렇게 내가 머리를 굴려야 된다고 온갖 남을 속이는 일을 만들었다가 험악한 세월만 130년을 살아가는 미련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험난한 세월 속에 야곱의 마지막이 좋았다는 것은 “성도들은 마지막에 약속 보장이 있는데 이것은 본향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하나님 백성에 대한 인생 보장이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신 2013년이라는 시간을 주어진 사역에 저마다 최선을 다한 모습으로 오늘 마무리되기를 바랍니다. 세월이 흘러감이 짧아지는 인생 시간의 안타까움이 아니라 본향의 승리로 다가가는 희망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종말론적 설교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와 지혜로운 다섯 처녀를 비유 설교하심으로 미리 준비하여 영원의 세계에서 승리의 본향에 입성할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의미로 우리는 2013년을 보내고 또다시 떠오르는 2014년 아침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1년 동안 어디에 마음을 썼는가? 내가 한 일이 정말 주님의 뜻이었는가? 반성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고난스러워도 우리가 해야 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멈추어야 됩니다.

이 일이 지난 후 야곱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영적 충만이 이루어져서 마지막에 그가 한 일은 열두 아들을 앉혀놓고 예언 기도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다 되지 않습니까? 야곱의 생애는 이렇게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2013년에 나그네 여정을 또 마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험악한 세월을 이겨갈 수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바뀐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신선한 희망을 약속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은 130세 이후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2014년부터가 우리 모두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로서 저는 갈보리교회 주일 설교를 마지막하고 11년 몸을 담았던 이 자리를 떠나서 또 어떤 곳을 향하는 하나의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 남편이나 아내를 향해서 부르는 호칭이 가장 정다운 말이 “당신”이라는 단어입니다. 11년 한 결같이 손을 잡고 이 순례자의 길을 걸어온 여러분을 “당신”이라고 제가 불러보면서 어젯밤에 시를 하나 썼습니다.

 

“당신!

비탈진 목회의 언덕길을 숨 가쁘게 오를 때

당신이 등 뒤에서 나를 밀어주었어!

 

고난의 십자가 사명 길을 눈물지며 멈추고 싶었을 때

당신이 앞에서 내손을 잡았어!

 

목마름에 지쳐 길가에 주저앉았을 때

당신이 한 잔의 물을 들고 내게로 왔소!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불면의 시간에

당신은 하트그림의 소리 없는 문자로 나를 재웠소!

 

너무 좋아 흥분을 감추지 못할 때

당신은 나의 자만을 채찍 하였소!

 

산소 같은 당신

빗줄기 같은 당신

보름달 같은 당신,

 

푸른 바다 푸른 하늘 푸른 잔디밭 같은 당신,

이제 한마디 약속을 하면서 당신 곁을 떠나겠소!

 

당신을 위한 내 기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소!”

 

우리 다같이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복음 성가를 다 같이 불러봅시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I Love You!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지나간 28년 동안 갈보리교회를 지켜주셨나이다.

부족한 종을 이 강단에 세워 11년 동안 행복한 사역을 하게 하셨나이다. 이제 또 앞으로 하나님이 갈보리교회를 지켜 주시옵소서.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 사랑의 교회가 되도록 인도해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은 가지 않는 용기를 주시고 주의 뜻은 괴로워도 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갈보리 교회 안의 교인들 위에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부탁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13년 12월 29일 이필재 목사 주일 예배 설교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