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누구인가?
마태복음 16:13~20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
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
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12월 성탄의 계절이 오늘부터 시작됩니다. 이 기간을 대강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기간으로 온 세계가 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탄의 계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밝혀보는 일은 가장 훌륭한 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를 믿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예수를 위해 순교자도 됩니다. 그러면 “그가 누구이기에?” 이런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의 궁금증이 나타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궁금해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에 대한 몇 가지 대답이 나왔고, 마침내 옳은 대답 하나가 나오는 중요한 대목을 본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 몇 사람이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코끼리를 만져보고 그 감각으로 평가를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는가?
한 사람은 코끼리를 만져보고
“아! 코끼리는 기둥같이 생겼습니다.” 다리를 만져본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코끼리는 벽과 같습니다.” 코끼리의 몸통을 만져보았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코끼리는 멍석을 말아놓은 것과 같습니다.” 코를 만져보고 한 말입니다.
네 번째 사람은
“코끼리는 아주 작습니다.” 꼬리를 만져본 것입니다.
그들은 그 경험을 가지고 일평생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고정 관념을 갖게 됩니다. 끝까지 우기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의 감각 기관이 가장 잘 발달된 손으로 확실하게 경험한 내용이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말은 사실인가?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서는 절대로 코끼리의 모양을 상상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맞는 말이면서 틀리는 모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똑같은 반응이 나타났다는 것을 암시한 예화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똑같은 반응이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셨을 때 제자들이 세 가지 대답을 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부분적으로는 맞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세례요한이 했던 일의 성격이 비슷합니다. 당시 세례 요한이 메시야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한 분위기가 유대 나라에 무르익어 갈 때 세례 요한이
“나는 아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그분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그리스도이다. 나는 그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비교해볼 때 메시야성이 똑같기 때문에 거의 같은 분위기를 주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 사람들이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더러는 엘리야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 대표적 예언자가 엘리야였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그 많은 인간 가운데 죽음을 경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간 예언자입니다. 지금도 엘리야를 기념하는 영적 축제는 계속됩니다. 갈멜산의 기념 동산은 일 년 내내 순례자들이 전 세계에서 끊이지 아니하고 찾아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로서 엘리야와 성격이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라고 사람들이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나라 편에서 보면 애국의 측면에서 나라 망한다는 소리를 끊임없이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미움을 받았고, 그로 인해서 흘린 눈물이 너무 많아서 ‘눈물의 선지자’라고 별명을 붙였습니다. 예수님도 똑같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성전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이보시오! 왜 선지자가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진다고 말합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이 성전은 46년이나 걸려서 건축한 견고한 건물인데 이 성전이 무너집니까?”
하늘나라 도성이라고 하는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다.”고 예언하실 때 (사람들은)
“아니, 이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이 멸망한다고 하다니!”
예레미야나 예수님과 사역의 성격이 유사점이 있었기 때문에 ‘아! 이 분이 예레미야인가? 그 옛날 예레미야가 다시 살아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답들은 예수님을 실망시키셨습니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면서 틀리는 모순의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궁금해서
“너는 누구냐? 이가 뉘기에?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어떤 사람은
“아니,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대제사장은
“네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밝히 말하라.”
빌라도도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모든 말은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서 묻는 질문입니다. 하는 일을 보면 하나님같이 하지 않습니까? 메시야적인데 나사렛 동네의 가난한 목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자니 하나님 같은 일을 하고…. 그래서 예수를 바라보는 시각의 갈등이 그렇게 많아진 것입니다.
“이가 그인가?” 이것입니다.
어떤 아줌마가 나를 자세히 쳐다보고 이 아저씨는 이필재 목사를 많이 닮았다고 말했습니다. 맞았습니까, 틀렸습니까? 맞으면서도 틀렸습니다. 닮았다는 말은 그가 아니라는 말 아닙니까?
예수님의 본질을 안다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도 지금 예수 믿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왜 의문을 가졌는가?
신성부분 때문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인성은 우리와 똑같습니다. 자고 먹고 일하고 피곤하고…. 신성부분은 아무도 못하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분명히 우리 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도시락 하나 가지고 온 것 가지고 물고기 2마리, 보리떡 5개 밖에 없었는데 이 5천명이 먹고도 남았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이것은 하나님의 초능력적인 기적이다. 그러면 이가 누구냐?”
물 위로 걸어가셨다고 했습니다. 병자 치유는 현장 치유를 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이 사람에게서 이런 일이 나타나는가?”
막 갈등합니다. 믿자니 요셉의 아들이고 목수 노동자이고, 안 믿자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똑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누구요?”
예수님은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내가 이미 말했느니라.” 그러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이 다른 방법은 알 수가 없고, 그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가르쳐주고 있나? 성경의 증거를 찾는 것이 가장 예수님의 본질 파악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 했던 것을 밝히면 예수님의 본질 파악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의 성취자라는 것입니다. 모든 구약 성경의 초점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인류 구원을 완성할 것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이 성경에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어 인류 구원을 위한 그 때에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지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정확하게 알 수 있는가? 여러분과 저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2013년대에 이렇게 살고 있는가? 하나님이 이때에 여러분과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이 때에 필요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도록 미리 계획하신 섭리가 나타난 증거로서의 실체가 곧 나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학의 정의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 보십시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깊으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니까 여러분이 세상에 이 21세기 초에 사는 것은 세상을 지으시기도 전에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신 것이 지금 때가 차서 여기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섭리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것이 곧 '잉카네이션', 즉 '성육신' 사건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 그때 오셨는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도 유대 나라도 계보를 따질 때는 다 남자 이름으로 합니다. 족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은 더합니다. 아예 여자는 시집오는 날부터 자기 성은 없어지고 남편 성을 따릅니다.
창세기에 보면 남자의 개입 없는 순수 여자의 후손이라는 계보가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뱀한테 저주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겠다.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너와 여자의 후손은 싸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너’가 누구입니까? 마귀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 짓고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너를,
여자의 후손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싸울 것이다. 네 머리를 때려 부술 것이다.”
그렇게 벌써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 탄생은 사실 하나님이 여인만 사용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있습니다. 1장 24~25절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반드시 인간으로 오셔야 될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의 족보만 빌린 것이지 남자의 수고가 없는 동정녀 탄생입니다.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 창세기 예언의 성취자가 예수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이제 죽을 때가 되어서 임종합니다. 열두 아들 다 모아놓고
“다 모이라. 너희의 후일의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예언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두 아들을 놓고 차례대로 다 예언합니다. 유다 차례가 되었을 때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유다에게 준 야곱의 예언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왕권에 대한 것이고 홀은 임금님이 가지는 지팡이입니다. 그것을 유다가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고 마귀의 권세를 항복시키게 될 것이다.”
유다에게 그런 예언을 했습니다.
“네 형제의 찬송이 될 것이며 네 형제들이 네 앞에 절할 것이다. 모든 백성이 그에게 복종하리로다. 그러니까 만왕의 왕 메시야는 바로 유다 지파를 통해서 오실 것이며 그는 만왕의 홀을 손에 들고 만백성이 그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니까 그리 알아라.”
하고 유다에게 예언해주었습니다. 메시야 출생과 사역에 대한 예언인데 그러면 유다 지파 계보를 계산해보면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이렇게 계속 내려가는데 다 첫 번째 아들로 가지 않습니까? 야곱의 첫 아들은 르우벤입니다. 마땅히 르우벤이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데 르우벤을 집어치우고 야곱은 유다에게 그 예언을 주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르우벤은 첫아들인데 아버지 야곱을 괴롭힌 순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첩인 빌하와 통간하는 죄를 지어서 장자의 권한을 상실해서 유다에게 계보가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계보가 계속 내려가다가
“요셉이 예수를 낳으니라.”
르우벤은 상실하고 유다에게 준 예언대로 되어져서 만왕의 왕 예수는 유다 지파를 통해서 오실 것이라는 야곱 예언의 성취자로서의 예수입니다. 구약이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1절을 보십시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오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결실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 가문에서 출생할 것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베들레헴에 왜 가셨습니까? 거기가 다윗의 고향이기 때문에 호적 하러 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루 종일 설교할 것이 다 있습니다.
“나은 장소는 베들레헴이 될 것이다.” 미가서 5장 2절!
“동정녀 처녀가 낳을 것이다.” 이사야 7장 14절!
“낳자마자 애굽으로 피난 갈 것이다.” 호세아 11장 1절!
“사는 장소는 나사렛이 될 것이다.” 왜냐?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하심이라.”
그래서 나사렛에서 사셨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당나귀를 타게 될 것이다.” 스가랴 9장 9절!
“은 30에 팔리게 될 것이다.” 스가랴 11장 12~13절!
“십자가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 53장, 스가랴 12장 10절!
“십자가 고통 받을 때 쓸개 탄 포도주를 주리라.” 시편 69편 21절!
로마의 형법대로 한다면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다리를 꺾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흉악범을 처형할 때 다리를 다 꺾습니다. 그게 순서입니다. 마지막 죽음을 확인하는 순서를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다리를 꺾이지 아니하리라.” 시편 34편 20절!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가 입었던 옷을 서로 가지려고 제비뽑을 것이다.” 시편 22편 18절!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말할 것이다.” 시편 22편 1절!
“그러나 그의 육신은 썩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시편 16편 10절!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았습니다. 예수님이 그것도 아시고 그 사실을 미리 발표했습니다. 그때 말씀 마가복음 14장 21절에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자신이 가는 길의 모든 내용은 예언되어져 그 길을 내가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잡으러 달려드는 로마 군인들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성질 급하니까 참지 못하고 무력 대항을 합니다. 어느 틈에 칼을 뽑아서 첫 번째 달려드는 로마 군인 '말고'의 귀를 깎아버리는 민첩함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검을 집에 도로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기도해서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무력대항을 한다면 보잘 것 없는 너의 단검에 의지하겠느냐? 그 검 하나로 로마를 당하겠느냐? 하늘에 있는 천사의 군대를 불러다 내가 이 사람들 다 진멸시킬 수 있다.”
“그런데 왜 안하십니까?”
그 다음 성경 구절에 뭐라고 나옵니까? 마태복음 26장 54절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내가 가는 이 고난의 길은 예언되어져있다. 그러니까 나는 예언되어져있는 대로 이 땅에 태어났고 예언대로 살고 있으며 이제 예언대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 섭리 가운데 때가 차서 오셨다가 기록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가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복음 사역에 다시 수고할 사도들을 찾아나서는 모습이 성경에 나왔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나타나 자신의 부활을 확인시켜서 새로운 사명감을 갖도록 영성훈련을 시켜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 보면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제자는 예수의 부활에서 반신반의하는 듯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부활하셔서 그들 옆에 따라가서 이야기하시는 중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였는데 우리 관원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말했노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그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시체는 보지 못하고 다시 사셨다는 천사의 소리를 들었노라.”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말은
“헷갈린다.” 이런 말입니다.
“아니, 또 살아나셨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는지? 그러나 봤다고 우긴다.”
“우리는 그가 죽지 아니하고 살아서 이스라엘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런 이야기들을 하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는 그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렇게 예언되어져 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이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심이라.'
길을 가면서 성경공부를 시켜준 것입니다.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이 성경에 예언되어져 있음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눈이 밝아 부활하신 예수를 깨닫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증거하러 갔다는 거 아닙니까?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있을 때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부분 24장에 보면 44절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너희에게 말한바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다.”
이에 저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나는 하나님이 이때에 세상에 가라고 때가 차서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 세상에 와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성경에 예언된 일을 그대로 하다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십자가 고난을 받고 죽고 다시 부활하여서 이렇게 하나도 예언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성서 해석의 원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 구약 성경도 예수를 통해서 봅니다. 이사야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처녀 잉태로 동정녀 탄생을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아!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이것이구나. 예수님이 이렇게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 이 일이다.’ 그렇게 성경공부를 시켜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을 보면 다 밝혀집니다. 왜냐? 성경이 그에 대해서 모두 다 예언하는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성취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구약의 예언된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하셨던 예언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 예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승천하시기 전에 이루어진 예언입니다.
“내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다.”
고난 받고 죽으셨지 않습니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이런 예언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신 있게
“나는 죽어도 예수님 안 버릴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냐?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몇 시간 만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예언성입니다. 말씀하신 것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또 한 가지는 장차 이루어질 예언입니다.
“내가 다시 오리라.”
초림 예수는 고난의 종으로 오셨지만 그때는 심판 주로
“천사장의 나팔 소리로 구름을 타고 오리라.”
이것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매우 둔감합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며 예수님에 대한 예언은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이 바로 그것입니다. 안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떤 약속을 하셨습니까?
“내 말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 설교 제목 “예수님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차 오실 예언을 우리가 믿고 고백하면서 이 성탄절이 매우 행복하고 즐겁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성경은 예수님에게 초점을 두고 예언했나이다. 모두 다 이루어졌나이다. 예수님이 평소에 예언하셨던 것도 모두 다 이루어졌습니다. 앞으로 다시 오리란 예언은 남겨놓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다 이 성탄 계절에 인류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왜 그때에 거기에 그렇게 오셨으며 그렇게 사시다가 가셨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깨닫고 매우 의미 있고 행복한, 그리고 영적으로 흥분하는 성탄 계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13년 12월 1일 이필재 목사 주일 예배 설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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