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성도의 행복하게 살아가는 다섯 번째 조건이 “긍휼이 여기는 자”라고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내용들은 일종의 자기 성취의 완성, 자기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이웃에 대한 나의 의무로, 그 부분이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 일상생활 용어 가운데 “긍휼”이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국어사전에 “긍휼”이라는 말을 설명하기를 “불쌍히 여기다”, “가엽게 여기다”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불쌍한 사람 도와주었다고 해서 ‘아! 내가 그에게 긍휼을 베풀었다.’ 이런 말을 안 합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긍휼히 사랑하사” 이런 말은 안 쓰고, 대통령이 백성을 긍휼히 여긴다는 말도 안 씁니다. 또한, 선생님이 학생에게 긍휼을 베풀었다는 말도 사용하지 않는 말입니다.
이런 단어는 고상한 용어에 속하는 말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용어가 “긍휼”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표현이 긍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할 때 먼저 우리가 생각할 일은 지난 주일 행복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서 의의 문제로 나왔는데 그 다음 행복으로 주어진 말씀이 긍휼이라고 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와 긍휼은 언제나 동행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의만 내세우다 보면 무서운 심판이 계속될 수가 있습니다. 옳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 의의 기준으로 다스려 버리면 살아남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의” 다음에는 “긍휼”이 뒷받침을 해주어서 하나님의 자비성에 의한 은혜를 받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의에 긍휼이 따라붙지 않으면 냉정하고 무자비하고 무서운 사건만이 생겨지게 되는데, 의는 살리고 긍휼을 따라붙으면 용서와 기쁨, 은혜가 함께 가는 역사가 있어서 이 의와 긍휼을 나란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이 긍휼에 대한 낱말의 뜻을 우리가 생각해 보는 것이 말씀에 대한 해석에 필요합니다.
몇 가지로 나오는데 “상대방의 마음에 동참한다.” 이런 뜻으로 사용을 합니다. 나 혼자 있을 때 긍휼은 필요 없습니다. 반드시 이웃과 관계성을 가질 때만 필요한 것이라서 이것은 상대적 성격이 성립되는 말씀입니다. 어떤 이웃과 내가 함께 하였을 때 그 상대방 마음에 동의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그러면 ‘만약 상대방이 옳지 않은 나쁜 마음을 표현할 때도 내가 동의하라는 말인가?’ 이렇게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로 앞에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의로운 일에 긍휼의 마음을 가지라.”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의와 긍휼! 특별히 이 긍휼의 구체적인 방법을 이야기하라면 불쌍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간혹 우리가 우리 주변의 어떤 불쌍한 자를 보고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한센 병자 같은 사람들을 여러분이 보았을 때 유대인의 생각이 성경에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저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았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니까 우리도 버려도 된다.” 긍휼은 뭐냐 하면 그 반대로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소록도에 다섯 번 방문해서 그들을 위해서 다소 협조한 일도 있고 가서 부흥회도 했습니다. 또, 필리핀에도 소록도와 똑같은 마을이 있어서 거기에도 제가 찾아가서 협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들은 사람같이 않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망가질 수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만큼 어려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모두 격리수용합니다. 이것도 다 전염병이니까 이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해 온 것이 우리 문화이고 특별히 유대인의 문화였습니다. 그러니까 유대 사회에서도 한센병 환자는 완전히 새끼줄 쳐놓고 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내가 막아야 합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해서 한센병 환자가 있다는 것을 내가 의무적으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굉장히 어렵게 삽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오히려 더 나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 사람들은 하나님께 저주 받은 것이니까 빨리 죽는 것이 낫다.’ 이런 마음을 가집니다. 그런데 사실 가서 보면 상당히 힘듭니다.
그런데 성경에 한센병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그런 취급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아주 지극한 사랑의 마음,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상대방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나님이 불쌍한 인간들을 찾아오셔서, 인간 편에 서셔서 인간이 되어 주심으로 인간 편에서 모든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을 우리가 여러 가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고 얄미운 사람도 있고 후한 사람, 박한 사람, 간교한 사람, 모두 있습니다. 이 긍휼은 불쌍한 사람을 불쌍히 대우하는 인격적 마음을 말합니다. 무자비나 잔인이나 무정이나 포악, 천대, 냉정, 무시 같은 마음의 정반대 개념을 긍휼이라 합니다.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긍휼의 사역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할 수 있으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되는가 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어떤 사람들을 가장 불쌍히 여기셨는가에 대한 사역의 초점을 맞추어 보면 우리도 할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 중에 제일 큰 일이 무엇입니까? 죄를 사해주고 영혼을 불쌍히 여겨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는 일을 예수님이 제일 많이 하신 일 아닙니까?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나의 일평생에 나에게 가장 큰 최대 은인이 누구였는가를 그때 가서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내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또 다른 사람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 최대 긍휼 사역으로 성경에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있든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그 불쌍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긍휼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선교사들의 사역을 많이 협조하고 있는데 이유는 나도 선교사들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예수 믿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전도를 받아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긍휼을 입었으므로 긍휼하게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해준 그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 내게 온 거 아닙니까? 그래서 긍휼의 최대 사역은 영혼 구원을 위해서 다른 구원 받지 못한 영혼을 위해서 선교를 하고 복음을 전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이것이 최대 긍휼 사역으로, 이것이 최대의 긍휼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오래 전에 제가 모스크바에 가서 러시아 사람들을 놓고 수백 명 앞에서 설교를 했는데 모스크바 대학 기숙사에 묵으면서 했습니다. 그 대학에 고려인 교수가 한 분 계셔서 그분과 약속이 되어서 간 것입니다. 그분은 러시아 대학의 교수이면서 우리 조선말을 잘 하셨기 때문에 통역을 아주 쉽게 하셨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다 통역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제 설교를 통역하는 과정에서 한번 가고 두 번가고 갈 때마다 그분이 통역을 하다가 성령이 충만해지셨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그렇게 좋은 모스크바 대학의 교수 자리를 사표를 내버리고 신학 공부를 그때부터 해서 목사가 되어서 “우리 아버지는 고려인으로서 출세를 해서 러시아의 대표로 북한의 대사로 오랫동안 근무를 했기 때문에 내가 북한 드나드는 게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북한의 가장 어려운 지역인 두만 강변에 가서 선교를 하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으니 이 목사님이 나를 좀 후원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 가서 흙벽돌로 한 20여명 들어갈 수 있는 교회를 두만 강변에 마련해 놓고 거기서 소를 기르겠다고 소를 사달라고 하셔서 소를 사드렸더니 그것을 가지고 하나씩 한 가정에 나누어주면서 자립의 길을 가자고 해서 전도를 하셨습니다.
그 후로 최초로 7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사진을 찍어서 나에게 보내시며 “이 사진은 공개하지 마십시오. 공개하면 이 세례 받은 사람이 위험합니다. 그러나 선교 보고를 하니까 그렇게 아십시오.”
그때 저는 얼마나 흥분을 했는지 모릅니다. 왜 흥분을 했느냐 하면 7명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에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최초로 안수 받은 목사가 7명입니다. 그 7명이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고 사역을 했더니 대한민국이 이 완전 숫자에 의해서 선교지 국가가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두만 강변 선교지에서 7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니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의 영혼을 영생으로 구원하여 주는 이것보다 더 귀한 일은 세상에 없기 때문에 “불쌍한 자를 불쌍히 여기라.” 긍휼한 마음으로 선교를 해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대통령이 되었든지 재벌이 되었든지 아무 상관이 없이 예수 안 믿으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럴 자를 그렇게 여기라. 이게 긍휼의 마음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가지고 가는 복은 어느 나라나 몇 가지를 가지고 왔는데 교회가 없는 지역에다 교회를 세워서 영혼 구원의 사역을 하고 영혼이 구원받는 사람이 늘어가고 또 하나는 무지를 불쌍히 여겨 교육을 시키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알지 못하는 게 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다 교육 기관을 세워서 무지의 백성들을 깨우쳐서 인간답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살게 하는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도 언제 학교가 있었습니까? 선교사들이 와서 이 나라를 바라보았을 때 너무 불쌍한 겁니다. 그래서 긍휼한 마음을 베풀어서 이 나라에 학교를 세워서 신문화 교육을 가르쳐서 오늘날 그 시작이 대한민국을 교육 강국으로 만들었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보십시오.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과 복음을 가르치라는 교육적인 발언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교육에 힘을 써서 열심히 자아를 하나님의 자녀로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을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 사역을 보십시오. 아마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복음서에 나타난 것을 보면 분량적으로 3분의 1 내지 4분의 1 정도는 환자를 고쳐주는 사역을 그렇게 많이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인간답게 사려면 건강한 신체가 되게 도와주는 일이다.” 그래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서 복음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병원이 생겨서 우리나라도 갑신정변 때 고종에 의해서 알렌 의사에 의해서 최초의 병원이 광혜원이었고 그것이 오늘의 세브란스 병원이 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질병에 시달리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에는 그 당시에 병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고쳐주었지만 인구가 이렇게 많아진 온 세상은 몇 사람이 다니면서 말씀으로 설교해서 병 고치는 일이 실제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의학과 과학이라고 하는 은혜를 주어서 모든 의사들이 이 사역에 몸을 바치게 함으로 기독교 국가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병원이 세워져서 불쌍한 사람들을 고쳐주어서 회복시키는 치유 사역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지금 의료 강국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역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군중에게 빵을 나눠주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서 다 배불리 먹여주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거기 벳새다 들녘에서 빵을 나누어 줄 때도 무리를 불쌍히 여기사 불쌍한 사람들을 불쌍하게 볼 수 있을 때 주는 마음 그것이 긍휼입니다.
설교자들이 누구나 사용하는 예화 가운데 성 프랜시스의 이야기를 잘합니다. 그는 어느 추운 날 말을 타고 가다가 길가에 헐벗고 굶주린 거지 하나가 벌벌 떨고 있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말에서 내려서 금방 얼어 죽을 것 같은 그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서 입혀 주었는데 그래도 벌벌 떨고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쳐다보니까 한센병 환자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기의 체온을 이 사람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가슴을 풀어헤치고 그 사람을 꽉 끌어안고 이쪽 체온이 저쪽으로 옮겨가서 이 얼은 몸이 녹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한센병 환자촌에 가서 그 사람들과 한번 식사해 보십시오. 밥맛이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들과 몸을 접촉할 수 있는지 해보십시오. 처음에는 작정을 하고 갔다가도 그 사람들을 보면 못합니다. 한센병도 전염병입니다. 피부 접촉에서 오는 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어려운 것입니다. 내 몸의 체온을 그에게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한번 해보십시오. 내가 한센병 옮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소록도에 갔다 와서 그 사람들과 신체 접촉하고 악수하고 함께 밥 먹었다고 설교하니까 그 다음부터 교인들이 나와 악수를 안 하더라고요.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그런데 프랜시스가 그렇게 해서 몸을 다 녹여주고 살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금방 내가 품고 있던 그 한센병 환자가 별안간 그 눈길에서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지금 금방 여기 있어서 내가 안고 있었는데 어디 간 거야?”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작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프랜시스야! 참으로 고맙다.”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프랜시스는 그때부터 생각하기를 ‘아! 그 한센병 환자가 주님이었구나!’ 그래서 그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그때부터 마음을 작정하고 ‘나는 내 사명을 찾았다.’ 그래서 그 간증 때문에 성 프랜시스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런 사람과 똑같이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지는 작은 일들을 바로 이 긍휼 차원에서 생각하고 실천해 나가는 그 사람이 복이 있다고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보내서 영혼을 구원하고 학교를 세워서 교육을 시키고 의약품과 의료인들을 불러서 치료를 해주고 식량을 보내서 굶주림을 면케 해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하는 일도 이거 아닙니까? 초점을 거기에 맞추어 주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주님이 하셨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을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긍휼의 뜻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일반적 용서보다 이 긍휼의 용서는 훨씬 무게가 있고 깊이가 있는 내용입니다. 뭐가 깊이가 있고 무게가 있다는 말인가? 조건부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조건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고 싶으면 내가 긍휼히 여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이 조건부 설교가 아주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주기도문도 조건부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조건부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긍휼은 내가 긍휼을 베풀 때 하나님의 긍휼이 내게 오도록 그렇게 조건부라서 용서하는 마음에 깊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긍휼이 내게 임하면 내가 어떤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었을 때 하나님은 “네 죄가 아무리 커도 긍휼로 다 해결해 버리시겠다.” 이것이 조건부입니다. “죄가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순간적으로 다 없어지는 긍휼을 내가 너한테 주겠다.” 조건부로 되어 있단 말입니다. 용서받기 힘든 자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긍휼을 말합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기독교 최대 장애물 하나가 생겼습니다.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입니다. 기독교를 말살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을 잔멸할 새” 하나도 없이 씨를 말려 버리려 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받습니까? 그게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그에게 임해서 그런 사람이 용서를 받고 주님의 사도가 되었을 때 그 사실을 깨달은 사울이 바울로 변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 막달라 마리아도 그 사회에서 돌멩이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 가장 가까이 들어올 수 있었는가 말입니다. 긍휼의 법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긍휼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다 하나님의 긍휼의 법의 은혜자니라. 다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긍휼을 입은 자가 긍휼을 베풀어야 될 거 아니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이 긍휼의 세 번째 마음 해석은 인색과 반대의 개념입니다. 후한 마음, 그게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말과 손에 복이 있다는 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말을 후하게 하고 손을 후하게 쓰면 그 복이 자신에게 후하게 돌아온다는 진리입니다. 저는 이것이 성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부하게 하면 내가 부해지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주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영접, 패러독스 진리로 “손해 날거 같지만 그 자체가 복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모두 이웃으로부터 받고 싶어 하는 대접이 항상 있습니다. 이웃이 나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해주길 기대합니다. 또, 설사 내가 좀 잘못이 있다하여도 너그러운 이해를 기대합니다. 어떤 때 내가 어떤 고난을 당할 때 이웃이 조금 도움의 손길을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남에게 내가 먼저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조건부로 남을 대접하라. 그러면 네가 똑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남에 대해서는 온갖 악담 같은 저주를 퍼붓고 나는 좋은 평가를 바란다면 그것은 악령의 종노릇입니다. 의학상으로 나쁜 생각, 나쁜 말을 많이 하면 질병 확률이 높아진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엔도르핀을 막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신경 쇠약에 걸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해놓고 그 보복이, 내 마음 속의 양심이 나를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말해놓고 일종의 보복이 두려워진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는데 무엇이 행복한가? 아주 많습니다.
내적인 행복이 있습니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100퍼센트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후한 말을 했고, 후하게 손을 폈고, 잠자리가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내 양심이 나를 도와줍니다. 긍휼을 베푸는데 무슨 보복이 있겠습니까? 말도 긍휼을 베풀며 살고, 행동도 긍휼을 베풀고, 마음의 긍휼을 선물하고, 때로는 물질의 긍휼을 보내면 돌아오는 복은 내 영혼의 평안이라는 내적 복이 생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면 손해날 것 같지만 그게 복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대 긍휼의 복은 내가 이웃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겨주신다는 조건부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이 되는 긍휼의 복을 우리가 피차 나누면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공동체는 크나큰 복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습니다. 긍휼을 베푼 자도 그렇게 만납니다. 내가 베푼 긍휼은 하나님이 기억하셨다가 나의 인생 여정의 어느 때, 어떤 고난에 처했을 때 나에게 긍휼을 받은 자가 그 순간에 나타나서 나를 도와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기억하셔서 그렇게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안 만날 거 같은데도 만납니다. 하나님이 내 곁으로 보내시도록 각본을 짜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미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긍휼까지 간다면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다윗과 요나단 관계를 기억해 보십시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가 죽으면 국민의 인기를 얻고 있는 다윗이 왕이 될 가능성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요나단은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자기 아버지가 죽이려는 다윗을 위해서도 긍휼의 마음을 가집니다. ‘다윗을 어떻게든지 살려서, 그리고 다윗을 왕위에 올려놓아야 된다. 우리 가문이 대를 이어서 왕이 되는 것은 의롭지 않다.’ 그리고 자기가 왕이 될 그 자리를 다윗에게 물려주는 작업을 생명을 걸고 하지 않습니까? 온갖 위험을 다 무릅쓰고 다윗을 기어코 살려내서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어디서 만납니까? “그의 후손들이 누가 있느냐?” “네, 있습니다. 데려와라.”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 긍휼을 베푼 자의 후손들에게 다윗이 어떤 긍휼을 베풉니까? 그 후손들을 놓고 “너희는 죽을 때까지 이 궁중에서 나와 한상에서 밥을 먹을 것이다.” 긍휼을 베풀었지 않습니까?
저는 이 문화의 변천사 같은 것을 떠올려 봤을 때 옛날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옛날의 인간관계는 참 긍휼적인 마음의 문화가 많이 있었는데 오늘 날은 이상하게 변해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도 옛날 사랑이 훨씬 더 좋았던 거 같습니다. 보십시오. 성춘향은 이 도령이 거지꼴이 되어 왔는데도 “잘나도 내 낭군이요 못나도 내 낭군이다.” 맞아들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은 안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정치 변화의 희생물이 되어서 쇠사슬에 묶여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갈 때 그것을 바라보는 아내가 부르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10년이 가고 100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와요.”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를 때는 중간에 대사가 나옵니다. 슬픈 대사 한마디를 합니다. 그게 옛날 사랑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케이 팝이 부르는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나는 처음부터 네가 별로였어.” 이러면서 부르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별로인데 왜 사귀어놓고 금방 변했느냐 말입니다. 옛날이 더 좋은 거 같습니다. 지금은 너무 이상하게 변해갑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 기대감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기 좋아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과 사귀면 그 사람에게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 기대감 때문에 내가 사랑하게 되어 그런 것을 합니다. 긍휼은 그런 것을 다 초월하는 것입니다.
“Because(때문에)”와 “In spite of(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차이는 “Because”는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있을 때는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In spite of”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이것이 긍휼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너무 좋아.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다 좋아.” 그렇게 다 좋은데 자기 기대감 하나가 안 될 때는 “우리 교회 이게 뭐야? 이런 것도 안하고?” 자기 기대감 이 한 가지 조건이 안 맞을 때는 가차 없이 평가를 해버리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인들도 그렇습니다. 긍휼한 마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의의 기준과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누군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밑지고 살아야 합니다. 밑지고 사는 방법은 손해 보며 살고 이기지 말고 지면서 살아야 합니다. 때리지 말고 맡으면서 살고 욕하는 자를 위해서 함께 욕하지 말고 축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긍휼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예수를 잘 믿으면 바보 같아집니다. 예수님도 바보로 사셨지 않습니까? 하나도 잘못이 없는데 왜 사형을 당하십니까? 빌라도 앞에서 “내가 무슨 잘못이냐? 네가 재판관이면 옳게 재판하라!” 한마디만 해도 될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바보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바보인가? 가장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게 예수 믿는 자의 역설적, 역리적 패러독스적 진리의 삶입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그 말씀의 뜻을 모르십니까? 긍휼의 마음은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으니까 긍휼을 사역하시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긍휼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었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긍휼의 법의 은혜를 입은 저희들이 긍휼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긍휼을 기초로 사람과 교회를 바라보는 마음을 가지는 것인 줄 믿사오니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임재하여 주시사 주님의 긍휼을 닮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12년 2월 5일 이필재 목사 주일 예배 설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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