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보리교회 외/갈보리교회 이필재목사 설교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

산넘고 물건너 2012. 2. 25. 22:39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

마태복음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갈보리교회 오기 전까지 제 소속은 미국 장로교단 목사였습니다. 언더우드를 한국에 파송한 PCUSA 장로교단입니다. 이 교단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아예 신학의 방향을 그렇게 정하였습니다.

그 신학의 기초를 ‘Reconciliation Theology’, 즉 ‘화해신학’이라고 해서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신학을 열심히 훈련시키고 있는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인물을 길러내고자 하는가? 바로 피스메이커(Peacemaker)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장로교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반대인 트러블메이커(Troublemaker)입니다. 화해를 일으키는 사람과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교육을 시킵니다.

저는 이 신학을 공부하고 훈련을 받은 것이 아주 다행스럽게 나와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이 신학의 기초를 제가 열심히 실천하면서 목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여기 이 말씀의 뜻을 잘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평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런 말이 아닙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주 뜻이 다릅니다. 나 혼자 화평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를 화평하게 만드는 사람, 평화를 창조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이 여기에 강조점을 두어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 복을 내리셨는가?

당시에 유대 사회를 살펴보면 화평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갈래갈래 찢어져서 다 원수가 되어서 삶의 현장을 지옥같이 만들어버렸던 사회를 보고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먼저 이 사회를 보면 정치적으로 지배자와 식민지로 갈라져있었습니다. 로마와 식민지 유대 백성은 도저히 화평을 이룰 수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또 어떻게 생각하느냐? ‘유대인과 비유대인은 절대로 화평하지 못한다.’ 아예 화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 생각에는 비유대인이란 무엇인가? 아예 문장이 있습니다. “비유대인이란 지옥에 불을 피우기 위해 쓰이는 땔감이다.” 그들의 문장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방인 여인이 어쩌다 어린 아이를 출산하는 것을 보면서도 “절대 도와주지 말라”, “쓸데없는 인간 출생에 신경 쓸 일이 없다.” 아예 이렇게 교육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무슨 화평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아예 불화하려고 마음을 먹고 잘라냅니다. 종교적으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있습니다. 이 장벽을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또 지역적으로는 “유대와 사마리아인은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의인과 죄인의 장벽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 비판했습니다. 동네 사람인데도 차별했습니다. 아주 극심한 문화입니다. 하나도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는 갈래갈래 콩가루 집안과 같은 것이 유대인 사회였습니다. 더구나 남자와 여자의 성차별은 콘크리트 장벽입니다. 어린이와 어른의 장벽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헬라파와 히브리파의 장벽도 있습니다. 갈기갈기 찢어진 사회 구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절대로 화평을 이룰 수 없는 사회였습니다.

그런 사회에 이 제목을 예수님이 던지신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간 역사를 보면 가장 큰 고난이 있습니다. 바로 전쟁 역사입니다. 전쟁 문제만 전문적으로 연구한 라이트 교수가 있습니다. 1480년에서부터 1941년까지 460년 동안에 인류 전쟁 역사만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적하는 무게 있는 전쟁만 간추려 발표를 했는데 “영국에서만 78번, 프랑스에서 71번, 스페인에서 64번, 러시아에서 41번, 오스트리아에서 52번, 독일에서 23번, 중국에서 11번, 일본에서 9번, 미국이 13번! 이게 우리가 살아온 역사이다. 끝이 없는 전쟁을 했는데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가?” 전쟁은 승리자가 없게 마련입니다. 우리나라도 1950년에서 지금까지 62년 동안 한반도에 전쟁 상황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6·25 전쟁은 누가 승리했나? “전쟁에는 승리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도 6·25 전쟁을 통해서 남은 거라고는 수없이 많은 젊은이 사망자, 부상자, 잿더미, 전쟁고아, 전쟁미망인, 사생아, 굶주림, 구호물자, 강냉이 죽, 혼혈아, 밀가루 배급, 달라 배급, 도깨비 시장…. 이런 단어들만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평을 만드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큼직한 복의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것인가? 세 가지 방면이 해당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평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화평입니다. 이것이 제일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 사람과의 화평 문제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품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또,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이루어질 화평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노라.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 마음의 화평입니다. 우리 삶의 제일 어려운 부분은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이 깨어진 평화 속에서는 누구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부부 싸움을 했는데 많은 돈이 행복의 조건이 됩니까? 아이들과 불화하면 무슨 생각이 납니까? ‘아! 내가 그토록 피나게 노력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구나.’ 허무감이 옵니다. 이웃과 불화하면 살맛이 안 납니다. 여러분 모두 직장에 다니시는데 직장 동료들과 불화의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그 직장을 버리게 됩니다. 영생의 문제를 취급하는 교회마저도 불화의 문제가 생기면 떠나게 됩니다. 평화가 깨지면 편안한 잠이 불면 증세가 생기고 건강에 결정적 타격을 줍니다. 아무리 고급 요리를 차려놨다 해도 식욕이 없어서 식사를 못하게 됩니다. 의욕이 떨어져서 성취에 큰 지장을 갖게 됩니다. 정신 안정에 문제가 생겨서 일반적 생활 리듬이 깨지는 바람에 실수를 많이 하게 됩니다. 혈액 순환이 급격히 저하됨으로 피부 노화가 급격히 오게 되면 금방 늙어집니다. 사람 얼굴이 훤해 보이면 뭐라고 합니까? “뭐 좋은 일 있나요?” 어두워 보이면 “무슨 근심 있나요?” 바깥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화 창조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게 복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 성격 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고백하는 것이 십자가 정신인데 그 십자가 정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인간을 화평하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팔복 가운데 이 화평의 대목에 있어서는 만약 이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화평의 문제는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인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난히도 싸움과 분쟁을 좋아하는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절대 필요합니다. 우리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이 평화의 문제는 희생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진리입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한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없으면 안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이 희생 부분이 화평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데 희생이 힘든 것입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싸웠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종들이 서로 싸운지라.” 왜? 생업의 관할권에서 양쪽 모두 다 양떼가 많아져 물과 풀이 모자란 바람이 “너희가 물러나라.” “우리가 물러나지 않겠다.” 이렇게 싸웠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됩니까? 아브라함의 양보와 희생으로 해결되지 않습니까? 유목민 생활의 절대 조건인 풀밭과 물이 있는 좋은 땅을 조카 롯에게 다 양보하고 자기는 거칠고 메마른 사막을 향해서 외로운 길을 떠나는 희생으로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누군가는 손해 보아야 해결됩니다. 바로 그 손해 부분이 싫어서 서로 버티고 있기 때문에, 자존심을 부리고 있기 때문에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한반도는 지금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기독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 정부에 날마다 갖다 주고도 밑지는 장사를 한다고 신문에 늘 보도가 됩니다. 그 말은 맞는다고 생각이 됩니다. 무엇을 그렇게 많이 갖다 주고도 얻는 것은 없는 것 같은 인상을 항상 주니까 조금은 손해보고 억울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정치가 아닌 인도주의 차원의 사역을 하는 우리가 손해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보다 잘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도 그러한 인도주의 시작이 마침내 통일이 되었으니까 우리도 그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정치적 접근은 틀렸습니다. 수백 번 해보았자 손해만 납니다. 저는 예언할 수 있습니다. 6자회담 수백 번 해보아도 북한은 핵을 절대로 없애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남한도 핵을 만들면 됩니다. 미국에 가서 몇 개를 갖다 놓던가, 우리도 만들던가 그렇게 하기 전에 이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92년 한반도 비핵화 피차 선언을 하고 나서 그들은 핵을 만들었잖아요? 북한은 정치를 다 거짓말로 합니다. 그것을 믿으면 큰일 납니다. 오직 인도주의 사업만 필요하다고 봅니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는 끌어안고 북한 정치는 배격해야 되는 모순 상황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날 하나님 앞에 죄를 하도 많이 지으니까 하나님이 화가 나셨습니다. “내가 이 백성 멸해버리겠다.” 그런데 그때 지도자인 모세는 하나님의 이 선언을 듣고 어떻게 생각합니까? 모세는 사실 고소하다고 생각해야 옳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하도 말을 안 들어서 “하나님! 나를 당장 죽여주세요.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때려죽이겠다고 당을 지어 나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대신해서 그 말 안 듣는 백성들에게 진노해주신다니까 “잘되었다, 이놈들! 하나님 맛 좀 봐라.” 이렇게 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이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하나님!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제하여 버리소서. 나 지옥에 가겠습니다. 영원히 멸망당하겠습니다. 이 백성들 살려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를 들으사 진노를 철회했다 하셨지 않습니까? 같이 망할 것을 각오하면 같이 살게 되는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이 재산권을 롯에게 다 양보하고 슬프게 떠났지만 결과는 어떻게 났습니까? 롯이 차지한 소돔과 고모라 땅은 하나님의 심판의 장소가 되었고 아브라함은 길이 남아서 믿음의 조상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축복이 오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믿음의 세계 안에서는 이기지 마십시오. 지십시오. 지면서 예수 믿으세요. 양보와 희생적으로 선택하십시오. 그러나 절대로 하나님이 승리를 그에게 주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불화의 내용이 있을 때는 “네가 내 앞으로 와!” 안 옵니다. 그러면 “내가 네 앞으로 갈게.” 절대로 안 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화평이 이루어집니까? “우리 함께 주님 앞으로 가자.” 그래야 합니다. “네 소원대로도 말고 내 소원대로도 말고 주님의 소원을 함께 이루자.” 이래야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이 진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자기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나를 복종시키려는 자세가 아니라 내 뜻에 하나님을 복종시키려고 그렇게 말합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공갈 협박적 기도를 합니다. “만약 이것을 안 들어주면 하나님 가만 두지 않겠습니다. 나한테 혼나지 않으려면 빨리 들어주세요.” 비록 내 뜻과 비전이 객관성 있는 옳은 일이라도 불화가 생길 때는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찾아야 공동체 화평이 이루어지지 어떤 사람은 독야청청 자기 뜻만 순교자적으로 고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다 좋아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곤란해집니다. 그런 사람들이 꼭 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다행히 화해신학(Reconciliation Theology)을 공부한 덕을 입어서 ‘내가 그 신학 공부하기를 참 잘했다. 거기에서 몸을 담고 오랫동안 훈련 받은 것이 나에게는 참 고맙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 화평의 문제를 앞세워서 일처리를 하는 마음이 제게 생겼으니까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그것이 실천되었으니까 늘 자신에게도 고맙고 주님께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게는 한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을 몇 년 동안 열심히 했더니 거기서 저를 오라고 초청장이 여섯 번이나 왔습니다. 그런데 왜 안가느냐고 장로교단, 총회장, 사무총장…. 높은 사람들이 북한 정부의 초대를 받아서 가니까 “이 목사! 당신 돈 많이 보냈잖아! 그러니까 가자고!” “그래? 그러면 나도 마지막으로 가보지.” 그래서 초청하는 거니까 기뻐서 교회에 발표했습니다. “여러분이 헌금하셔서 북한 동포 돕기 참 많이 했는데 거기서 오라고 여섯 번째 초청장이 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한번 총회장 모시고 다 같이 가는데 끼어서 다녀오겠습니다.” 광고를 하자마자 큰 난리가 났습니다. 교인들이 가지 말라는 겁니다. “왜 가지 말라는 겁니까?” “거기 가면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뭐가 이상한 일이 생깁니까?” “총회 차원에서 북한 정부의 초청인데 괜찮습니다.” “그래도 안 가시는 게 좋습니다. 목사님 괜히 거기 가셔서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시면 어떡합니까?” “뭐가 이상합니까? 여러 사람이 함께 가는 건데요?” 그런데 화평이 깨질 거 같은 겁니다. ‘교인들의 요청도 들어야 목사인데 잘못하다간 이 문제가 교회의 불화를 가져오겠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화평이 아니다.’ 그래서 나만 빼놓고 모두 다녀왔습니다. 갖다 와서 저보고 “이 목사는 교인들 설득 못하고 리더십이 그게 뭡니까? 이번에 다녀와서 평양에 장로교 세울 기미가 있는데….” 그래서 “내가 교인 비자를 못 얻었습니다.” 대답했습니다. “목사는 뭐 하나 하려면 비자 낼 데가 하도 많아서 다 좋아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날 “제가 양보를 하고 취소하겠습니다.” 오랜 회의 끝에 결정을 하고 조금은 씁쓸한 기분으로 집에 들어갔더니 또 제 아내가 있더라고요. “교회가 비자를 내주었어도 내가 안 내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거기는 뭐하려고 갑니까?” ‘어휴! 이 비자가 또 어렵구나.’ 이 모든 공동체 일은 자기 자존심을 끝까지 세우다가는 평화가 깨집니다. 그러니까 자존심을 좀 죽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화평하게 만들어야 공동체가 되지 내 감정대로 하려고 하니까 싸움 밖에 할 게 없잖아요? “네가 내 앞으로 와라. 내가 네 앞으로 가겠다.” 절대로 안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에 옳은 일인가를 객관적 기준으로 평가를 해서 주님의 옳은 일일 때는 그쪽으로 가야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옳고 좋은 일이고 교인들이 다 원해도 자기감정이 틀리면 끝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불화의 원인은 항상 거기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 다른 점을 접어두고 공통점을 서로 승화시켜야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창세기 1장, 2장에 “종류대로”라는 단어가 계속 나옵니다. “종류대로”라는 말은 서로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 다름이 조화를 이룰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쌍둥이도 얼굴이 다릅니다. 걸음걸이조차 똑같은 사람 이 많은 인구 가운데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격, 목소리 다 다릅니다. 이 다름이 어떻게 하나가 되겠습니까? 특성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나의 특성을 살려나가는 공통점입니다. 나의 것을 소중히 지키면서 다른 사람의 특성을 침해하지 아니하는 마음가짐이 인격적으로 형성이 될 때 그 공동체는 아주 행복합니다. 미국 장로교단은 총회장이 목에 걸고 다니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일 년 동안 공식 석상에는 반드시 목에 걸고 나와야 합니다. 의무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하나가 아니고 세 개입니다. 크게 만들었습니다. 왜 세 개냐고 제가 물어봤더니 세 교단이 합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른 교단의 특성을 무시하지 않고 “우리 모두는 없어지지 않고 함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가는 세 개다.” 이런 의미로 십자가 목걸이를 총회장이 일 년 동안 자기 임기 동안에 걸고 다닙니다. 오랫동안 서로 헤어져서 각기 길을 가던 것을 합친 것인데 그때 제일 최대한 신경 쓴 것이 “상대방의 특성을 침해하는 말을 하지 말자, 그대로 살려주고 공통으로 좋아하는 주제만 향해서 가자.” 그러니까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공동체라는 것이 잘못하면 비생산적인 소모적인 것에 에너지를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는 사회악과 싸워야 하는데 내부에서 사회악을 만들 때가 있습니다. 이게 마귀가 바라는 것입니다.

화해자의 반대는 누구입니까? 로마서, 고린도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당 짓는 것, 분쟁하는 것, 수군수군하는 것, 비방하는 것, 교만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피해를 입는다고 했습니다. 간단합니다. 여기 지금 어떤 부부가 있습니다. 밸런타인데이가 되었습니다. 여자는 “오늘 같은 날 분위기 있는 양식집에 가서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즐기자!” 이랬더니 남편은 양식은 절대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라면 끓여먹자.” 의견 충돌이 왔습니다. 그러면 이 화해는 어떻게 해서 이루어져야 합니까? 그럴 때 두 사람이 서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불만으로 계속 말할 수가 있습니다. 부인은 “여보! 당신 의식 변화 좀 해요. 인생을 좀 업그레이드해요. 오늘 같은 날 라면이 뭡니까? 분위기 있는 곳에 가서 양식을 먹으면서 서로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해야지! 촌스럽게 그게 뭐예요?”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시다. 남편은 그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습니까? “흥! 아니꼽다, 아니 꼬아! 네가 언제부터 분위기 찾는 여자냐? 업그레이드 좋아하고 있네!” 이러면 영원히 화평이 안 이루어집니다. 간단한 거지만 진리입니다. 그럴 때는 피차 라면을 좋아하는 남편을 존중하고 분위기를 좋아하는 부인을 존중하면서 둘이 공통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끝까지 우겨서 한편이 졌다고 합시다. 가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내가 와서 스테이크를 썰고 있지만 두고 봐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평화입니까? 그러니까 공통의, 모두 다 좋아하는 것을 향하여 가야만 합니다. 이것을 지혜롭게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갈보리교회 온지 벌써 10년째 목회를 합니다. 이제는 10년이나 되었으니까 여러분과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습니다. 10년 동안 목회하면서 우리 갈보리교회 이렇게 많은 교인들 가운데 저와 단 한번이라도 싸우신 분 계십니까? 저는 싸우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사회에서도 안 싸웁니다. 다른 데서 상관 말고 갈보리교회 온 후에 저는 부부싸움, 말다툼도 한 번도 안했습니다. 사실 할게 없는 건 아닙니다. 있지만 양보하는 겁니다. 이 정신만 가지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원하는 바를, 교인이 원하는 바에 경청을 하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래서 자랑 같지만 47년 목회하면서 제가 목회하면서 한 번도 싸우고 분열하고 언짢은 거 단 한건도 없었습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이 시킨 것입니다. 그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성경을 믿으면서 평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내일부터도 전라남도 지방에 부흥회를 하러 갑니다. 부흥회를 하러 가면 반대로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 강사에게 살짝 다가오는 교인이 있습니다. 아주 살짝 옵니다. 살짝 오는 사람은 목사에게 불만 있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옵니다. “목사님! 우리 목사님과 친하시죠?” “그러니까 왔지요.” “아! 잘됐습니다.” 지금 한국에는 미국 교포 2세 목사들이 많이 나와서 대형교회 담임 목사가 됩니다. 제가 만납니다. 그런데 거기서 오래 살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영어가 튀어나오지 않습니까? 빨리 하다보면 더 쉬운 말이 튀어나옵니다.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 우리 목사님이 이번에 설교 가운데 영어를 잘난 체하면서 쓰는 거 하지 못하게 살짝, 살짝 해주십시오.” 이런저런 부탁이 늘 있습니다. 그래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하기에 내가 대답을 뭐라고 했느냐? “No! I’m not could do that.” 영어로 대답을 했습니다. 영어를 잘하니까 영어가 나오는데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면 “우리 목사님 영어도 못한다.” 그럽니다. “영어 잘하는데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셔야지요. 그러면 그것을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것을 기준으로 설교를 하란 말입니까? 그것은 이기주의입니다. 공동체를 생각하셔야지요. 영어 잘하는 사람 얼마든지 있는데요?”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피스메이커(Peacemaker)의 우리말의 가장 좋은 번역은 ‘부드러운 중간 역할’입니다. 인내와 관용, 용서와 희생할 능력이 갖추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손해 보면서 물러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교회들이 재산 싸움하는 것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재산 가지고 싸우면서 이 파, 저 파 나뉘어서 “이것은 우리 것이다.” 하는 것을 볼 때 ‘저런 싸움을 교회가 왜 하나? 저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인데…. 개인들이 재산 싸움하면서 법정에 가는 것인데 교회가 무슨 재산 싸움을 다하나?’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런 일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해를 못하겠지만 “네, 가지세요. 다 가지시고 예수 잘 믿고 잘 사세요. 우리가 나가겠습니다. 우리가 오막살이로 나갈게요. 들판으로 나갈게요.” 그게 아브라함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 가진 롯은 심판 받아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그리고 다 주고 떠난 아브라함은 영원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지는 자가 이기는 것입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그래서 패러독스 진리라는 것은 역설적이라는 것입니다. 질수록 좋습니다. 예수님이 잘못해서 십자가에 달렸습니까? 희생, 완전희생입니다. 이것을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려면 희생이 따라야지 희생 없이 무슨 화평을 이룹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이기지 마십시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화평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볼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속성! “너의 죄를 기억 안하시겠다.”입니다. “♪ 너의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 하시네 ♬” 그래서 우리가 용서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억을 너무 잘합니다. 과거 집착형입니다. 기독교는 미래 지향적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푯대를 정했습니다.” 삶의 철학을 정하는 것입니다.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쫓아가노라.” 그런 사람이 진취적이고 성공하고 훌륭하고 나중에 잘됩니다. 과거에 얽매어 있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정신병만 생깁니다. 20세기 100년 동안에 10대 뉴스 가운데 독일의 베를린 장벽 민초들이 허물어 낸 것입니다. 그것은 대통령이 헌 것도 아니고 기업인이 헌 것도 아닙니다. 화평을 소원한 민초들이 참다 참다 못해서 곡괭이를 들고 나가서 때려 부수었습니다. 그래서 통일이 되었지 않습니까? “과거야 어찌되었든 그 과거 때문에 미래까지 불행하란 말이냐? 그럴 수 없다. 나는 푯대를 정했습니다. 앞으로 가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성공합니다. 사람의 성격을 구별하는 것은 피입니다. 피의 성격에 따라서 사람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 피를 하나로 묶어 버릴 수만 있다면 같은 성격의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피를 흘려서 우리가 일 년에도 몇 번씩 성찬을 만들어서 먹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의 다른 성격이 하나의 주님의 피의 성분으로 변하자.” 이 뜻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가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화평 신학을 기초로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 되는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여! 주신 말씀의 진리를 저희들이 잘 깨닫고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여서 우리 삶의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영적 능력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12년 2월 19일 이필재 목사 주일 예배 설교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