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의 복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일은 웃을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웃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이 있습니다. 직업적으로 사람을 웃기는 것을 연구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청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결혼관에 대해서 물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결혼하던 시기는 다들 어렵게 사니까 신랑감을 구하는 기준을 “식구들 밥 굶기지 않을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성실한 사람이 신랑감 1호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랑감 기준을 그렇게 생각하는 처녀는 없습니다. ‘나도 나가서 돈 벌수 있으니까 어떻게든 살겠지. 먹고 사는 문제는 둘이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1세들과 2세들의 결혼관에 대한 기준이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즘의 처녀들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결혼 조건이 뭐냐고 물었더니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찡’이 와야 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팍 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안 오면 100번 만나도 일하는 거 같고 아무 소용이 없답니다. 둘째는 좀 재미있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유머 감각도 있고 삶의 여유를 보이는 사람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제일 큰 결혼 조건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기계가 없어졌는데 옛날에는 핸드폰 같은 기계가 있었는데 스위치만 누르면 그 기계 속에서 각종 웃음소리가 납니다. “히히 하하 낄낄” 별 웃음소리가 다 나서 나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웃게 되는 웃음기계를 옛날에 팔았습니다. 그게 옛날에 인기가 있었습니다.
요즘에 캐나다에 이상한 교회가 하나 생겨서 조사 대상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수천 명의 교인들이 끝없이 웃습니다. 별로 웃을 일도 없는데 최면에 걸렸는지 웃어도 보통 웃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바닥에 쓰러지면서 웃음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상한 것이다. 이건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조사한 일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일은 울어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운다는 것은 거의 슬픔의 표현이니까 사람 눈에서 눈물이 떨어뜨리어진다는 것은 최악의 상태에서 나오는 심리적 현상이라고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이런 패러독스적 설교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이라는 말은 ‘가슴이 찢어지듯 아픈 상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풀이하면 “가슴이 찢어지듯 아픔이 있어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며” 이렇게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기억 속에 가슴이 찢어지게 아파 울었던 일이 언제입니까? 그런 일을 또 만나고 싶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왜 가슴 아프게 우는 자를 행복하다고 하셨느냐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 대한 해석을 제가 잘해야 은혜가 될 거 같습니다.
오늘 말씀의 뜻은 이것이 정답입니다. “울어야 할 때 울 줄 아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입니다. 우리 슬픈 눈물 속에 있었던 날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눈물을 통해서 인간은 몇 가지의 유익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 첫째가 눈물 속에는 가장 진실한 나의 모습이 발견이 됩니다. 우리는 톨스토이와 괴테가 남긴 인생에 대한 유명한 말 한 문장씩 기억합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아니면 인생의 맛을 모른다.” 또 하나는 “눈물의 밤을 새워보지 않은 사람과 인생을 논하지 말라.” 그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호들이 남겨준 결론입니다. 철학적 냄새가 나는 이야기가 될 거 같습니다. 현대인의 슬픔 가운데 하나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를 향해서 이렇게 분주하게 가고 있는가, 무엇에 끌려가는지, 무엇 때문에 뛰고 있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또 얼마를 가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군중의 대열 속에서 나의 현 주소를 잊어버린 채 끝없이 슬픈 여정을 가야만 되는 것이 현대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끔가다가 우리가 슬픈 눈물에 잠기게 될 때는 나를 찾습니다. 잃어버린 나의 본질을 눈물에서 찾아내는 그런 힘이 슬픔 가운데 주어져 있습니다.
성경에도 아주 많습니다. 이 이사야는 20대 때 선지자가 되었는데 사실 웃시야 왕의 친척입니다. 웃시야 왕은 이스라엘 왕의 민족사의 선하고 훌륭한 왕으로 나타나서 40년을 통치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니까 ‘이 궁중에도 선지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사야를 선택해서 관선 선지자 역할을 이사야가 궁중에서 했습니다. 그러니 존경받는 왕이 그런 자리를 주니까 날마다 이사야는 이 왕궁에 출입하면서 선지자 역할을 하는데 왕과 똑같은 대우와 명예적 영광을 누리면서 살았단 말입니다. 어디를 가면 왕이 지나는 것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되고 무슨 말을 하면 임금님의 말과 같은 권위가 발휘되고 고생이라든가 눈물, 슬픔 같은 것은 하나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옛날에 한국의 큰 100주년 행사를 할 때 닉슨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한국에 가시니까 협조를 해주십시오. 그가 지금 큰 사역을 위해서 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한국 정부가 기독교가 하는 일을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물으면서 열심히 행사에 큰 도움을 준 적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웃시야 왕이 배경이 되어서 매우 존경받고 권위스러운 선지자 역할을 궁중에서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제도가 없지만 미국은 국회 목사가 있습니다. 제일 존경받는다고 평가되는 목사를 국회 목사해 달라고 국회가 초청합니다. 제가 LA에 있을 때 오걸비 목사라고 저와 함께 일하던 목사가 초청받아서 갔었습니다. 그때 국회에서 국회를 열려고 하면 목사가 나가서 먼저 기도하고 하늘의 뜻이 이 회의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는 회의를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회의를 시작하는데 국회만 그런 게 아니라 시의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시의회를 할 때 그 시에서 살고 있는 목사들이 돌아가면서 개회기도를 해주어야 그 다음에 시의회가 모인단 말입니다. 이사야는 궁중에서 그런 일을 했으니 얼마나 호화스럽게 일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별안간 웃시야 왕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6장 5절에 보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큰 실망이 왔습니다. “어떤 왕이 일어나서 이런 제도 다 없애버리고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그리고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래서 실망과 슬픔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를 바라봤을 때 자기의 모습이 그 눈물 속에서 아름답게 조명이 되어서 나왔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로다.” 자기 죄를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왕궁이 베푸는 큰 혜택 속의 선지자라서 그는 지금까지 바른 말을 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선지자다운 역할이나 선지자다운 말씀 선포를 하지 않고 부정한 입술의 동작으로만 살아왔던 자기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고 그 눈물 속에서 진실한 자기 발견을 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이제부터는 내가 입술이 정직한 하나님의 선지자 역할을 하겠나이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새로운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는 이사야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는 성경에 하나님의 아주 큰 어떤 실수가 있어도 사랑하고 보호하는 사람이 다윗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도 죄가 훨씬 더 컸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윗은 특별한 게 하나 있습니다. 애통이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그는 왕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애통이 필요 없습니다. 왕이 무슨 가슴을 찢는 아픔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가난하고 병들고 지위가 없는 서민들이나 있는 것이지 왕은 그런 애통이 하나도 필요가 없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좋은 일만 자기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은 얼마나 성경에 울었는지 모릅니다. 제일 많이 운 사람이 다윗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뭐가 그렇게 슬퍼서 요가 다 젖을 만큼 밤마다 눈물을 흘렸는가? 그게 다윗입니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나이다.”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애통으로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그렇게 보호하시고 사랑하시고 도와주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슬픔 중에 얻을 수 있는 큰 유익은 진정한 이웃이 생기는 복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이 되는데 교과서에 행복이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행복님이 화려한 옷을 입고 행복을 가슴에 안고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천사가 가로막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네! 세상에 가서 이 행복을 나누어주려고 길을 떠납니다.” “행복님! 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으로 세상을 가시면 행복을 받을 사람과 못 받을 사람이 또 주지 말아야 할 사람이 나누어져 있는데 누구든지 행복님을 환영하고 행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이 더 어지러워집니다. 그러므로 그 화려한 옷을 다 벗어버리고 거지꼴이 되어서 행복한 선물을 손에 들지 마시고 감추고 거지꼴로 세상에 가십시오. 그럴 때 행복님을 맞아들이는 그런 사람들에게 행복의 선물을 나눠주셔야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내 이웃은 누구인가? 주님도 예화 설교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는 가깝습니다. 산 고개 하나 넘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여리고는 곡창지대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시키고 여리고를 먼저 차지한 것은 전쟁도 먹으면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여리고성을 가지 않습니까? 거기서 농사지은 것을 가지고 당나귀를 싣고 산 고개를 넘어 예루살렘에 가서 팝니다. 돌아오는 사람에게는 주머니에 돈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노리는 강도가 그 계곡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 예화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들이 나의 이웃이 되어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그냥 지나가 버렸다. 사마리아 사람은 사실 자기와 관계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찾아와서 따뜻한 간호를 해주었으니 사마리아인이 그의 아름다운 이웃이 되었다.” 불행 중의 진정한 나의 이웃이 나타나는 진리를 예수님이 그렇게 설교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행복을 느끼며 풍성한 삶을 가지고자 할 때는 나와 함께 하는 이웃이 있어줄 때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이웃이란 슬픔 중에 내 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 중에 모든 인물들이 다 그러했고 우리 삶의 경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화려한 예수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는 메시야를 따르는 무리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고난의 예수의 모습이 나타날 때는 열두제자마저도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을 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슬픔 중 고난 중에 나타나는 나의 모습이고 내 주변입니다.
그 다음에 이 애통의 가장 큰 유익은 슬픔, 애통 가운데는 하나님이 나타나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에 간사한 곳이 있어서 고난스럽고 약해졌을 때 하나님을 찾게 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가운데 ‘은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사실 예수 믿는 사람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하면 무슨 문제든 다 해결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은혜 개념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거의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나빠진 것이 좋은 상태로의 변화’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은혜인데 맞습니다. 예를 들면 건강이 나빠졌었는데 좋아졌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병들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집사는 저주받은 것입니까? 가난했던 사람이 부자가 되면 물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백이 맞습니다. 그러면 지금 퇴직 당하고 사업이 망해서 어려워진 집사는 하나님께 벌 받은 것입니까? 이렇게 해석하면 무당 종교와 기독교가 다를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난스러운 것이 영광스러워지는 것은 좁은 의미의 은혜입니다. 이것도 좋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생각하면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고난스러운 자리에 내려가는 것도 그 속에 하나님의 큰 은혜가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육신적인 것은 다소 고난스러워도 영적인 것은 아주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준비되고 있어서 고난당하는 외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온다는 말이 성경에 그래서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게 되기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할 때는 흘리라는 것입니다. 애통을 해야 될 때는 애통하라는 것입니다. 애통이 절대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올 수 있는 하나의 영적 사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별로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은혜 생활을 하기 힘이 든 것입니다.
저는 간증 집회라는 것을 수없이 제가 참석해 봤고 그분의 책도 제가 수없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간증집회, 간증책 쓰는 사람들은 다 똑같습니다. 망하고 또 망하고 또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의 자리에까지 자기가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한줄기의 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부터 시작을 해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위로의 역사가 나를 찾아와서 마침내 오늘은 내가 이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의 똑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이 ‘이 간증 집회 강사가 되려면 과거가 험악하고 망할수록 효과가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 친구 목사들도 이런 사람이 몇 사람이 되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아서 지금 간증집회를 하러 다니는데 그 사람들은 설교 준비도 안하더라고요. 왜? 머릿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이는지 모릅니다. 그 간증집회 강사들은 기침만 해도 사람들이 “아멘” 하더라고요. 사실 저도 그 사람들 못지않은 간증이 있습니다. “나도 간증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5살 때부터 교회에 나갔습니다. 옛날에 주일학교에서 모범생들에게는 모범 카드를 주었는데 저희 집에는 그 모범 카드가 아주 많이 쌓여있었습니다. 항상 모범생이었고 옛날 제가 다니던 교회는 중등부, 고등부, 청년부가 없었습니다. 주일학교만 있었고 6학년 졸업하면 중등부가 없어서 바로 어른예배를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6학년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 때 주일학교 선생을 했습니다. 하라는데 어떡합니까? 저는 양영중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주일학교 선생하고 교회 종치고 교회 청소하고 교회 난로 피우고 열심히 봉사하니까 18살이 되었을 때 집사를 하라고 해서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목사님께서 출타할 때는 이 집사가 설교해!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주일날 목사님 안 계실 때는 그때부터 제가 늘 설교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소명 받아서 다섯 교회 개척하고 지금까지 46년 몇 개월 동안 목회했습니다.” 이거 보십시오. 사실 이게 진짜 좋은 간증인데 “아멘”도 안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간증 가지고 다니면 어디서 밥도 못 얻어먹습니다. 강사비도 안줍니다. 과거가 험악해야 합니다. 전과 1, 2범은 간의 기별도 안 옵니다. 전과 5범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안양 교도소에서부터 나와야 이게 진짜 간증이더라고요. 그 사람은 좌절과 실망의 자기 인생을 포기하는 그런 삶에 빠졌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어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이요” 그런 사람들이 간증집회 최고 강사들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애통하셨습니다. 언제 우셨습니까? 예수님이 우신 기록이 성경에 세 번입니다. 예루살렘 멸망을 보고 예언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왜 우셨습니까? 하나님의 도성이요 하늘나라 그림자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세계 영적 중심지가 폐허가 되는 것 때문에 우셨습니다.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셨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웃의 아픔을 보신 것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보고 울어야 할 때는 같이 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남북 전쟁 때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형제 잔등의 채찍 자국을 보면서도 눈물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말라. 흑인들의 등에서 흐르는 저 죄 없는 핏자국을 보고도 감동이 없느냐? 나는 이일을 결코 행해야 한다.” 그래서 남북 전쟁에 승리했지 않습니까? 이웃의 아픔을 보고 울어야 한다면 같이 울어야 합니다. 울 일이 있으면 울라는 것입니다. 애통하라는 것입니다.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영적 사인이니까 괜찮다. 울어라.” 그 다음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울며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 개인의 사명을 놓고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사명을 놓고도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골고다를 향해서 가실 때 갈릴리의 여인들이 따라오면서 울었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해서 울지 말라. 너희 자신을 위해서 울어라.” 울 때는 울어야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심령이 새로워집니다.
이 말은 의학계의 발표인데 타임지에 나왔습니다.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시간에 뇌가 치료가 된답니다. 뇌가 맑아진답니다. 그러면 골치 아픈 사람은 자꾸 울어 보십시오. 오늘 말씀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눈물은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백성의 눈물은 위로가 찾아온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울어야 할 때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위로가 찾아올 것이요” 이것입니다. “인생이 설다하고 마르지 않는 눈물을 가진 자야! 그대가 떨구는 방울 속에 진주알 같은 진리가 있나니 떨구고 또 떨구어도 거짓의 웃음보다 낫도다. 그대의 젖은 눈이 내 마음까지 적시니 어찌 그대의 눈물을 조물주가 무심하랴?” 그랬지 않습니까?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조건 밑에 애통하는 자의 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의로운 애통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반드시 온다는 약속이라서 고린도후서 1장 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거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위로를 위함이요 또 위로를 받는 너희 속에 역사하여 너희가 받는 고난도 너희가 견디게 하는 도다. 애통이 좋은 것이다. 눈물이 절대 나쁜 것이 아니다. 울 때는 울어라. 눈물 흘리는 그 뒤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나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애통이 민족의 영혼을 깨웠지 않습니까? 바울의 애통은 세계 선교의 기초가 되었고, 다윗의 애통은 죄 사함의 본보기가 되었고, 존 녹스가 애통하니까 스코틀랜드의 구원이 이루어졌고,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의 애통이 영국을 구원했으며, 마틴 루터의 애통이 교회를 새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한다. 애통하면 복이 있나니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 야고보서 4장 9절입니다. 여러분! 눈물 흘릴 때 괜찮습니다. 하나님 믿는 자는 눈물이 오히려 복이 됩니다. 울 때는 울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애통을 가슴에 안고 교회 오셨습니까? 그것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을 믿으십시오.
「 하나님 아버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주님의 패러독스적 설교를 저희들이 조명하였습니다. 우리는 가슴 속에 다 애통의 사건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위로의 하나의 영적 사인인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이 있사오니 성령님으로 저희들의 영혼을 일깨워주셔서 이 애통의 사건이 하나님의 큰 축복과 위로로 변해지는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12년 1월 15일 이필재 목사 주일 예배 설교 내용』
'☆ 갈보리교회 외 > 갈보리교회 이필재목사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0) | 2012.02.03 |
---|---|
온유한 자의 복 (0) | 2012.01.28 |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0) | 2012.01.14 |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 - 2011. 12. 18 (0) | 2012.01.09 |
인간이 되신 하나님 - 2011. 12. 25 (0) | 2012.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