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청결한 자의 복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인류 최초로 달에 갔다 온 미국의 군인 어윈 대령이라고 있습니다. 그분은 달나라에 다녀온 후 제대하고
세계 각국을 다니며 신앙 간증을 하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LA에 와서 강연할 때 저도 가서 직접 달 체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어떤 대학에 가서 강연을 했더니 대학생들이 그분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옛날 소련의 유리 가가린은 우주여행을 최초로 하고 와서 나는 하늘을 다 다녀보았으나 하나님은 보지 못했다고 기자 회견을 해서 전 세계에 알렸는데 당신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그분은 대학생의 이 질문을 하나님을 봤느냐 못 봤느냐에 대한 대답을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 그때 어윈 대령은 오늘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우주선을 탔다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어디서나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간다든지 하나님 만나려고 달나라에 간다든지 우주의 끝을 갔다 하여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하면 예수님 말씀대로 골방 속에 들어가도 하나님이 거기 계시고 땅굴을 파고 거기 들어가도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나 있어온 똑같은 일입니다.
빌립도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한 일이 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 했습니다. 이렇게 다들 보기를 원합니다.
또, 우리 한국 사회에서 전도할 때 하나님 믿으라고 전도를 하면 제일 많이 물어보는 말이 “하나님을 봤느냐?”라고 합니다. 자연 과학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된 사건에 대해서만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그대로 우리가 믿는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볼 수 있으며 본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 말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반대로 왜 하나님은 안 보이는가? 성경에도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의 종들조차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 그대로 마음이 청결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안보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누구나 한 번씩은 크게 실수를 하는 기록이 성경에 나와 있는데 그때 그들은 왜 그런 실수를 범하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안보여서 그런 실수를 범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는가? 다른 것이 더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구약 예언자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이 엘리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제자들의 대답 “엘리야라고 합니다.” 그만큼 엘리야는 큰 인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엘리야 생각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자기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기록이 열왕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도로 “나만 남았나이다. 다 죽였고 죽었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를 빨리 죽여주소서.” 그런 비참한 기도를 드렸지 않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그는 그 시간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핍박의 칼을 든 이세벨이 더 크게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감추어져 버렸습니다. 더 크게 보이는 대상이 있을 때 하나님은 안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이 시간에도 별은 수천 억 개의 은하수로 하늘에 떠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천 억 개의 별이 하나도 안보입니다. 왜 안보입니까? 더 크게 보이는 태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사라지고 밤이 깊으면 그 보이지 않던 별들이 가득하게 보입니다.
욥기서에 보면 욥이 고통을 잘 견디어 나가다가 한번은 실수를 합니다. 자기가 세상에 태어난 날을 저주하면서 속히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믿음이 좋던 동방의 의인마저도 왜 그런 실수에 빠지게 되었는가? 그 순간 욥은 고통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자기 마음에 부각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고통에 가리어져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나보다 더 사랑한 것이 있을 때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 심지어는 부모나 자식도 그 종류에 속했습니다.
무엇을 제일 크게 보느냐? 이것이 삶의 가치관입니다.
모세도 실수합니다. 사막에서 물 부족의 백성들이 원망을 가져왔을 때 신경질이 났습니다.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감정대로 때려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건대로 모세에게 큰 벌을 주셨습니다. “네가 나의 거룩성에 대해 훼손하였다.” 그토록 소원하던 가나안 정착이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 모세는 하나님보다 백성의 원망이 더 크게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감추어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똑같은 실수는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실수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고난이 시작되었는데 그 현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했습니까? 성경말씀대로 보면 어떤 계집종이 베드로의 얼굴과 말소리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너도 예수님의 제자였지 않느냐?” “아니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 “너는 북쪽 갈릴리 지방의 사투리 악센트를 쓰면서 왜 부정을 하느냐? 네 말소리가 너를 증명하고 있다.” “아니다.” 그런 실수를 범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시간 베드로의 눈에는 예수님보다 그 계집종이 더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 시대에 마음이 가장 청결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특권 계급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깨끗하고 율법주의로 살고 있는 그들을 예수님은 아주 깊이 책망을 하셨습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더러운 시궁창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식주의와 율법주의에 떨어졌다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는가? 뭐가 더럽고 뭐가 깨끗했는가? 이 사람들은 거의 가 다 다른 사람의 평가 기준에 인정받는 위선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종교적 전승을 중요시 하며 유전 신앙을 철저히 지키고 정한 규례를 벗어난 것을 죄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이것을 철저히 지킨다는 것을 남에게 보여주는 위선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깨끗하게 살고 있다.”라는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이 종교 의식은 그 마음이 벌써 더러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인정을 더 크게 평가하고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잘못 가면 사람들의 눈만 의식하는 외식종교, 의식종교로 변해버립니다. 생명력은 없어져 버립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는 사장님들이 많이 계시고 CEO들을 교육하는 국가 인정의 전문가도 계시고 장성급도 계시고 교장 선생님도 여러 분 계신데 그런 위치에 계신 분들은 제일 신경 써지는 일이 직원 관리 문제입니다. 모두 다른 철학과 관리 방법을 가진 것을 대화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CEO는 직원들의 잘못이 발견 되었을 때는 가차 없이 벌을 줍니다. 그래서 직원들이 벌벌 떨게 됩니다. 또, 어떤 CEO는 시간 관리를 철저히 체크하는 지도자도 계시고 어떤 분은 성과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상을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아주 다양합니다. 저 같은 목사도 동료 목회자들과의 관계성에 늘 신경을 씁니다. 오랜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어떻게 하든지 눈치를 보게 하는 것은 비생산성이라 판단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실은 감추고 형식만 보이게 하는 약삭빠른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시간 때우기만 급급하고 실제 생산적 열매는 없어지게 됩니다. 자유롭게 시간 관리를 하면서 열매가 있는 목회가 되어져야 함을 늘 저는 강조하기 때문에 주어진 책임량에 대해서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이고, 평가받아야 되고 눈치나 보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 눈치 때문에 성실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을 저는 느낍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문제가 이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이 선하게 살고 있다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눈가림으로 보여주는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마음이 청결해야지 겉으로만 포장했다고 그것이 청결인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철저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 우리가 좀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면 사람들의 눈은 가릴 수 있습니다. 눈에 잘 드는 외형적인 몇 가지를 잘 신경 써 가면 어렵지 않게 존경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이미 더러워져 있어서 하나님이 안보이게 됩니다. “사람들의 눈치가 더 크게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자는 마음부터 청소하라.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그 마음으로는 절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서를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따가운 비판 거리가 항상 되었고 핀잔과 괴로운 질문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음식을 잡수시더라.”라고 나와 있는데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 가시자마자 사람들이 금방 평가를 합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 그 사회에서 존경받고 칭찬받으면 그 집에 안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안 들어갔습니다. “세금 걷어서 로마에 보내고 로마 정부가 배분한 혜택으로 잘 먹고 사는 저 정치 세리장 삭개오의 집은 죄인의 집이다. 관계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저런 집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그가 아무리 돈 많은 사람이지만 나는 절대로 관계를 안가진다.”라고 자기 모습을 확실하게 결정해야 “아! 저 사람은 훌륭하다. 경건하다.”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철저하게 삭개오의 집에 안 들어갔기 때문에 그것으로 자기의 마음의 청결성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들어가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인가 많이 나누고 그 집이 제공하는 식사를 죄인과 함께 잡수시고 삭개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금방 예수님을 비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지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요” 말씀하십니다.
부모도 없이 처녀 둘과 오라비만 사는 베다니 마리아의 집은 왜 예수님이 그렇게 자주 가시고 그 사회에서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는 소문난 창녀 막달라 마리아는 뭐하려고 데리고 다니시는 것입니까? 그녀가 예수님의 발을 씻길 때 사람들이 참다못해 따졌습니다. “저가 선지자라면 자기의 발을 만지는 자가 죄인인 줄 알았으리라. 그러면 못하게 해야지. 그래야 경건성이고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이지.”
하지만 예수님은 “잘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이 일도 전하라.” 하셨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마음이 이 여자만도 못한 자들아! 너희들은 죄가 더 많지 않느냐? 애써 포장을 해서 좋은 색깔로 보이려고 애쓰는 너희들은 이 여자만 못하다.’ 이런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믿음의 담력이란 뭔가? 성경에 “담대하라. 마음을 강하게 하라.”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내 양심에 하나님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도 못 당합니다. 이런 사람의 행동은 자신감이 있고 언제나 담대합니다. 왜냐? 사람의 후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후원이 넉넉히 자기 양심이 자기를 후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 마음만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뭐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그 관계성에 하나님의 도움이 나와 함께 있다는 자기 양심의 후원을 얻는 사람은 담대하고 강합니다. 양심의 후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한 가지 기억하고 살아야 될게 있습니다. 남은 때리지 말아야 됩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죄가 더 많으면서 죄가 덜한 사람을 돌로 치면 되겠느냐? 그 마음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보이는 마음을 신령한 눈이라고 말하는데 신령한 눈은 마음의 청결에서 옵니다. 그 눈을 가지고 보면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발견이 됩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되고 꽃 한 송이만 보아도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성전에 오면 하나님의 거룩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되고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옵니다.
엄마들이 아기를 낳을 때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 몸에서 어떻게 사람이 탄생할까? ‘아! 이게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이고 신비이다. 그 하나님의 창조적 신비에 내가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기를 낳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농사지으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땅 속에서 생명이 산출이 되어서 인간의 생명에 절대적 도움을 주는 것일까?’ 신비함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못 보았다는 사람은 마음이 캄캄한 암흑의 세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캄캄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식량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창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겠습니까?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을 보고 있으면서 이 우주 안에 가득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무엇을 보여 달라고 하느냐? 그 마음은 악하고 음란한 것이다. 내가 보여줄 표적은 하나 밖에 없다. 요나의 표적이다. 십자가의 사건 밖에 없다. 나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세상에 왔고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고자 이 길을 가고 있는데 만약 그것을 보고도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을 못 볼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 교회는 안에도, 밖에도 그 하나님 표시로 십자가의 불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더 이상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뭘 보고자 하느냐?” “하나님 좀 보여주세요.” “하나님이 가득한데?”
중세기 시절에는 이 마음의 청결을 위해서 사람들이 세속을 떠나는 방법을 선택함으로 수도사들이 그렇게 많았고 수도원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입니다. 죄가 가득한 세상을 보지 않고 피함으로써 내 마음에 청결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결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지금 그 수도원들이 다 문을 닫은 것입니다. 세속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 마음을 어지럽히는 사건들을 보지 않음으로 청결 완성을 이루고자 금욕주의를 선택했고 나아가서는 고행주의를 선택했지만 그 노력은 아름답지만 결국 허무주의와 자기 인격의 갈등이라는 결론만 내리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괴로운 투쟁 밖에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마음을 청결하게 가져올 수 있는 것인가?
어느 날 니고데모라는 유대인의 관원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마음에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해답을 얻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 관심이란 뭐냐? 하나님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대답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 보고 싶으면 거듭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니고데모는 자기 눈에 볼 수 있는 자연 과학을 말합니다.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되는 겁니까?” 여기에서 이미 해답은 얻었습니다.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하는 마음 청결은 하나님을 보는 문제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음 청결은 성령의 은사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이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한 사람에게서 양면성이 나타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20세기 기독교의 절대 영향, 즉 나쁜 영향을 끼쳐서 기독교에 절대적 피해를 입혔던 칼 마르크스는 본래 목사가 되려고 신학 공부를 하려던 사람입니다. 바우어의 자유주의 신학에 잘못 물들면서 기독교의 대적자가 된 사람입니다. 목사가 될 뻔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가장 큰 대적의 역사를 만든 사람이 되었지 않습니까? 여러분! 히틀러의 어린 시절 소원은 목사가 되는 거였습니다. 양면성입니다. 이 길로 갈 것인가, 저 길로 갈 것인가? 그 양면성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 공산당으로 북한 기독교 말살 정책에 최고의 힘을 실어준 사람이 강양원 목사였습니다. 그의 아들 강영섭 목사가 얼마 전에 죽었다고 신문 기사에 났습니다. 저는 그 사람과 오랫동안 일을 좀 같이 했습니다. 평양에 국수 공장을 세워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국수를 나눠주는 작업을 할 때 제가 밀가루 보내주는 일을 그 사람과 4년 이상 손을 잡고 했고, 그 사람을 미국으로 초청해서 기자 인터뷰를 같이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북한에 교회가 없어진 것은 목사들이 앞장서서 했습니다. 천사와 마귀는 늘 가까운 곳에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신약시대 가장 큰 인물을 찾아보십시오. 먼저, 베드로는 예수님이 인류 구원의 길을 골고다로 방향을 정했을 때 방해자가 되었습니다.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은 절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님의 수제자와 사탄, 양면성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바울은 “내 속에 선과 악이 있어서 날마다 싸운다.”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다 똑같습니다. 주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마귀 사탄의 역할을 내가 할 수 있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습니다. 양면성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우리 인생의 어떤 계획 속에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역자가 되기 위하여 그렇게 많은 기도를 드리고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까닥 잘못하는 순간에 내가 마귀의 종이 될 수 있고, 주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양면성을 지닌 존재,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중요한 포인트 하나를 제공합니다.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 개신교회는 예배의 50퍼센트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에 할애하는 예배의 모범을 가져서 교회들이 이렇게 부흥이 되고 교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가장 선한 곳에 인도한다고 하는 영적 힘을 복음에서 찾는 신앙의 기초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활발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복음입니다. 이 말씀은 “태초부터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우리들에게 소개하는 것으로 복음서가 시작이 됩니다. 마음이 청결하려면 성령의 역사를 따라야 되고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며 받아들이고 그의 역사하심을 믿고 순종할 때 성령님의 역사 체험을 내가 갖게 되고 그 힘이 내 마음 속에 마음의 청결을 가져와서 그 움직인 마음 밭에 하나님은 날마다 내 앞에 나타나서 온 우주 만물 속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을 내가 발견하게 되고 내 영과 성령님의 교통이 날마다 이루어져서 사소한 작은 사건 속에서도 ‘아!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셨구나!’ 뭐든지 하나님과 연결해서 자기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성령 충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살아계신 하나님을 여러분의 눈으로 보시고 여러분의 손으로 만진바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내 곁에 언제나 항상 같이 계셔주시며 창조하신 우주 안에 가득하게 계십니다. 내 마음 속에 다른 것이 더 크게 보일 때 하나님은 감추어두는 진리를 저희들이 깨닫고 하나님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열려있는 영력의 마음을 주님이 모두에게 허락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12년 2월 12일 이필재 목사 주일 예배 설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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