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1번지 제주…그곳서 얻은 자식 이름엔 공통점이 있었다
중앙선데이 2022. 03. 05(토)
김홍준 기자
[휴가지가 된 유배지] 제주도
그 섬에 성이 있다. 추려보면 제주에 성은 더 있지만, 제주읍성·대정읍성·정의읍성 ‘삼성(三城)’은 삼각형으로 섬을 지켰다. 한라산(1950m)이 가운데에 버티고 있다. 왜구를 막고자 한 삼성은 동시에 유배 온 이들의 거점이 됐다.
제주는 유배 1번지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유배지는 245곳이고 유배인은 700여 명에 이른다. 조선 시대에 260여 명이 제주에서 귀양살이했으니, 전체 유배인 수 3분의 1을 넘는다.
제주는 한양에서 직선거리로만 1158리(455㎞)로 아득하리만치 멀고, 바다가 가시 돋은 탱자나무처럼 둘러치고 있으며, 게다가 관리에 의한 통제가 수월했다.
제주의 마지막 유배인은 독립운동가 이승훈(1864~1930). 일제가 보냈다. 1911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제주는 휴가지를 놓고 강원과 1순위를 다투고 있다. 유배 1번지에서 휴가 1번지가 된 제주의 ‘삼성’에 다녀왔다.
#『제주풍토기』엔 해녀 관련 최초 기록
인천~제주 뱃길은 세월호 침몰 후 7년 8개월 만인 지난해 12월에 다시 열렸다.
지난 1월 3일 제주에 가는 여객선 중 최대(배수량 2만7000t)인 ‘비욘드트러스트’에는 승객 200여 명이 밤바다의 부드러운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온 안톤 반 주트펀(70)은 "2층 침대에서 곤하게 잤을 정도로 흔들림을 못 느꼈다"며 "사실, 매점에서 파는 맥주를 한 캔 들이켠 게 숙면에 도움이 되지 않았겠나"라며 웃었다.
124년 전 1월, 구한말의 거물 정치인 김윤식(1835~1922)도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는 증기선 2층 침대에 올랐다.
그는 을미사변(1895년) 직후 명성황후를 폐위한다는 조칙을 각국 공사관에 통보했다는 이유로 종신 유배형을 받았다.
김윤식은 일기 형식으로 제주에서 보낸 3년 6개월을 『속음청사』에 썼다.
‘광무 2년(1898년) 1월 7일 출항. 배가 바람에 몹시 흔들려 구토하며 정신을 잃고 쓰러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오직 나만 다행히 면했다….’
김윤식이 탄 배는 군산과 목포를 거쳐 제주 산지포에 도착했다. 4박 5일의 고단한 뱃길이었다. 비욘드트러스트는 14시간30분 만에 인천~제주 뱃길을 끊었다.
김윤식은 현재의 제주시 일도1동을 적거지(謫居地, 귀양살이하는 곳)로 삼았다. 제주읍성 안이었다.
기생과 놀고, 현지에서 소실로 맞이한 ‘의주녀’와 사이에서 아들 영구(瀛駒)도 얻었다.
유배인이 제주 여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으면 이름에 제주를 뜻하는 ‘제(濟)’, ‘영(瀛)’, ‘탐(耽)’자를 넣고는 했다.
제주에 유배된 이익(1579~1624)도 현지에서 얻은 아들 이름을 인제(仁濟)라고 지었다.
김윤식은 『속음청사』에 제주 관리들의 학정에 대항한 방성칠의 난(1898년), 이재수의 난(1901년)까지 자세히 묘사했다.
‘1898년 2월 28일. 들으니 민(民)의 장두 방성칠이 (제주) 목사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 성 밖에 모여서 다만 물어볼 죄인이 있으니 호출하는 대로 내보내 주기만 하면 된다, 내일은 모두 성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3월 15일. 병사들이 집을 둘러싸고 불을 지르자 방역(방성칠)은 나오며 피하려다가 …두 일곱 군데 창을 맞고 쓰러졌다고 한다.’
‘1901년 5월 29일. 여러 민중이 제수(이재수)를 꾀어 장두로 추천하였다. 나이는 21세인데 어리석고 우둔하여 지각이 없고….’
김윤식에 대한 정치 행보 평가가 어떻든 간에, 『속음청사』가 제주 근대사를 보여주는 문헌이라는 평가를 받는 대목이다. 이 민란들은 제주읍성을 무대로 일어났다.
이미 김윤식 이전에 제주 유배기록을 남긴 이가 김정(1486~1521)이다.
김정은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돼 제주로 유배됐다. 김정은 제주읍성 동문 근처 언덕에서 유배 생활은 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때 쓴 『제주풍토록』은 제주의 풍경에 대해 사뭇 냉소적이다.
‘볼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기후만 해도 그렇다. 겨울에는 혹 따뜻하기도 하고, 여름에는 혹 서늘하기도 하다.’
주로 뱀을 모시는 300여 개의 ‘요사스러운’ 사당이 있고, 한라산 백록담의 움푹한 분화구를 ‘괴이하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이 색다른 곳을 밟아보기도 하고, 이 유별난 풍속을 보게 됨은 세상의 기이하고 장쾌한 일 아니던가.’
그가 제주에서 가장 뛰어난 맛을 자랑하는 것으로 꼽은 건 청귤(靑橘)이다.
김정은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했다. 제주로 오기 전, 충남 금산에서 유배 중 ‘무단이탈’ 해 병중의 어머니를 뵀다는 게 빌미가 됐다.
김정은 송인수(1499~1547)·김상헌(1570~1652)·정온(1569~1641)·송시열(1607~1689)과 함께 유배인이나 부임 관리로 제주 교학 발전에 기여한 오현(五賢)으로 꼽힌다. 이들을 기리는 오현단이 제주읍성을 끼고 있다. 그 너머, 가을이면 귤나무 숲이 장관을 이뤘다는 귤림추색(橘林秋色) 터가 있다.
# 원나라 왕족·신하 170명이 초기 유배인
김정희(1786~1856)는 한양에서 호남대로를 따라 해남까지 내려갔다. 여기까지는 ‘해남로’라고도 불렀다. 여기서 제주로 건너가면 이름이 바뀐다. ‘제주로’가 된다.
김정희가 귀양살이한 곳은 대정읍성 안이었다. 제주추사관은 김정희가 이곳에서 그린 세한도(歲寒圖) 속 조촐한 집 한 채를 쏙 빼내어 현대적으로 재현한 건물이다.
섬의 동쪽으로 달려 정의읍성에 올랐다. 성읍민속마을을 품고 있는 정의읍성 성곽 일부 구간은 탐방객들이 올라갈 수 있다. 조선 왕족이 이곳에 유배됐다.
선조의 7남 인성군(이공, 1588~1628)은 역모에 두 번이나 휩쓸렸다. 제주 정의현에 유배 가기로 했지만, 전남 지도로 바뀌었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대신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모반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신하들의 탄핵에 인조는 그에게 자진하라고 명했다.
인성군이 죽자 그 가족은 제주 정의현에 유배됐다. 인성군의 아들 이건(1614~1662)이 이때 『제주풍토기』를 남겼다. 잠녀(해녀)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2월 이후부터 5월 이전에 이르기까지 바다에 들어가서 미역을 채취한다. 잠녀가 알몸으로 낫을 갖고 미역을 캐어 올리는 데 남녀가 서로 섞여 있으나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제주풍토기』와 『제주풍토록』에서는 제주민들의 민간신앙, 특히 뱀을 신으로 모시는 것을 께름칙하게 적고 있다.
제주시 한경면 당산봉(148m) 밑에 차귀당(遮歸堂)이 있었다. 뱀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광양당(廣壤堂)과 함께 제주의 큰 사당이었다. 조선 숙종 28년(1702년)에 제주 목사 이형상이 태워버린 129개 사당 중 하나였다.
현재 당못잇당이라는 사당이 차귀당 자리에 있다.
회은군(이덕인, ?~1644)도 인조 때 모반과 관련해 제주로 유배 간 왕족이다.
제주는 진작부터 정권 유지를 위한 유배의 섬으로 활용됐다. 원나라는 1273년 삼별초를 섬멸하고 약 100년 동안 제주도를 지배했다. ‘칸’ 계승을 둘러싸고 위협이 될 만한 왕족과 신하 170여 명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제주 유배의 초기 기록이다.
명나라가 원나라를 제압하면서 원나라의 왕족들을 탐라에 보내기도 했다. 이들은 제주 양·안·강씨(氏)의 입도조(入島祖·섬에 처음으로 정착한 각 성씨의 조상)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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