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리 양천허씨(陽川許氏) 제주입도조 허손(愻) 묘
[제주환경일보 2019. 02. 27]
고려말의 충신으로 이성계가 등극하던 1392년 제주도에 들어왔다.
종달리 마을 서쪽 속칭 매망모르
양천허씨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을 조달해 준 공으로
허선문(許宣文)이 세거해온 공암의 공암촌주(孔巖村主)로 봉해져 그곳을 식읍으로 받았다.
양천허씨를 일명 공암허씨(孔巖許氏)라 함은 이에 연유된 것이다.
허손은 고려가 망하자 자진순국한 대제학 허흠(許欽)의 둘째 아들로 시조 허선문의 15대손이다.
그는 명가에서 태어난 고려말의 충신으로서 이성계가 등극하던 1392년 제주도에 들어왔다.
그의 형 허징(許懲)도 북도순검사 겸 병마훈련판관(北道巡檢使兼兵馬訓練判官)이었는데
두문동에 들어간 72인 중의 한 사람이다.
허손이 형을 그리는 단장시(斷腸詩) 한 편이 그 후손들에 의하여 전해진다.
遯兄雲北樓凉雨 送弟海南嗚咽波 從此弟兄南北去 海波雲雨客思多
(형님이 가는 북녘 하늘 서글퍼 내리는 비에 아우 보내는 남녘 바다 목메어 우는 파도여.
이 다음에도 형제가 남북으로 헤어진다면 구름 비 바다 물결 나그네 시름 많으리.)
허손은 당시 밀직제학(密直提學) 벼슬을 하고 있었으나
망하게 한 나라에서 벼슬을 할 수 없다 하여 대제학(大提學)을 주겠다는 이성계의 회유를 마다하고,
관군천호(管軍千戶)였던 아들 허우(許祐)와 함께 종달리에 적거하였다.
김해김씨 삼현파 카페에 따르면 조선에 불복한 죄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왔다고도 한다.
허손은 종달리에 터를 잡고 훈학을 폈다.
입도 5세에 이르러 발흥하기 시작했다.
동악(東岳) 허영필(許榮弼), 운악(雲岳) 허영림(許榮林), 남악(南岳) 허영집(許榮輯), 서악(西岳) 허영보(許榮寶),
한악(漢岳) 허영종(許榮宗) 등 5형제는 무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가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귀향하여 정의(旌義) 돈원(敦原)[표선면 세화리]으로 옮겨 살았다.
허손(許愻)의 무덤은 원래 방묘(方墓)였는데 실묘 상태에 있었고
묘는 골총이 되어 마을 사람들이 허가골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래 전에 소금을 팔러간 先民이 서귀포 지역에 머무를 때, 같이 간 동료에게 늦었다고 꾸지람을 듣자
‘허가골총에 놓아 둔 말을 찾지 못해 늦었다’고 대답했다.
마침 이 소리를 들은 주인이 허가골총이라는 말을 재확인하고는 선묘를 찾았다고 전해진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지미의맥 참조)
다소 높게 보이는 동산 위에 자리 잡은 묘의 모양은 원묘이다. 무덤의 크기가 매우 큰데
합묘여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고 후대에 흙을 더하여 크게 개수했을 가능성이 있다.
비석에는 大提學陽川許公遜 貞夫人密陽朴氏 合窆이라 새겨져 있다. 묘 앞에는 동자석과 문인석이 갖추어져 있다.
산담은 널찍하게 만들었는데 앞쪽은 트였다.
묘가 있는 밭 전체를 묘역으로 단장하여 외장(外墻)을 쌓았으므로 묘 전체를 막을 필요는 없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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