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저것·하간 것/제주도에서는

제주 유배객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랑

산넘고 물건너 2021. 10. 5. 10:25

조선시대 최악의 유배지 제주로 유배된 사람들 중에는 당대의 문장가들도 많았다.
정조 때 조정철(趙貞喆)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후일 제주 유배생활을 기록한 '정헌영해처감록'을 남겼다.
그에게는 제주 유배기간 중 죽음도 마다한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정철을 사랑한 홍윤애의 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777년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한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가담했던 ‘노론 벽파’ 세력은  큰 위기감을 느낀다. 
바로 ‘정조시해 역모사건'이 발생한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형조판서 홍지해가 연루된다.

그는 조정철의 장인이었다. 
 
조정철도 형틀에 묶여 혹독한 고초를 당한다.
그는 죽음은 면했지만 제주 유배형을 받았고,

부인 홍 씨는 죄책감에 스스로 목을 맨다.
조정철의 나이 27세, 과거 급제한지 3년째였다.
 
유배생활은 철저한 감시 하에 집 밖 출입이 원천 차단되었다.
대역죄인에게는 책 읽는 것 마저 금지되었다.
그의 정신세계는 극도로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를 구원한 것은 이웃집 스무 살 처녀 홍윤애(洪允愛)였다
향리의 막내딸인 그녀는  조실부모하고 오라버니 언니와 함께 의좋게 살고 있었다.


두문불출하는 이웃집의  한양 선비는 그녀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으니 더욱 궁금하였고, 그의 처지가 동정되었다.  

그녀는 남몰래 그의 시중을 자원하였다.
젊은 청춘들의 만남은 마침내 애정으로 발전하였고 
그들은 귀여운 딸을 출산한다.
 
그러나 비극은 바로 문 앞에 다가와 있었다.
홍윤애가 출산하고 바로 다음 달,

조정철과는 가문대대로 정적관계였던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김시구는 도착하자마자 조정철 제거에 혈안이 된다. 
 
제주목사에게는 '선참 후계권(先斬後啓權)'이 있었다.
절해고도 제주는 상황을 보고하고 조치를 취하기에는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죄인을 먼저 처단하고 나중에 장계를 올리면 그만이었다. 


김시구에게는 정적 제거에  더할 나위없는 기회였다.
그는 조정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가는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시구의 문초는 홍윤애에게로 향했다.


김시구의 음모를 간파한 홍윤애도 결코 고문과 회유에 휘말리지 않았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은 한층 더 극한으로 치달았고
살이 찢어지고 흩어지는 곤장도 견뎌냈다.

그녀는 조정철을 구하는 길은 자신이 죽는 것밖에 없음을 알았다.
갓 태어난 딸을 언니에게 맡겨 피신시키고, 홍윤애는 스스로 목을 맨다.
그녀의 나이 고작 20세였다.
 
김시구는 사태를 은폐하고자 조정철이 역모를 꾸몄다는 거짓 장계를 올린다.
그러나 사건의 내막은 곧 밝혀지고 큰 파장으로 번진다.
김시구는 파직되어 의금부로 압송된다.

부임 4개월 만이었다.


제주판관과 대정현감도 벼슬이 갈렸다.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었던 정의현감까지 갈아치운다.
정조는 제주감사를 잘못 추천한 죄를 물어 이조참판 김하재도 파직시키고,
사태 수습과 민심을 달래기 위해 순무어사를 파견한다.
 
조정철은 무혐의가 밝혀졌으나 첩첩산중 정의현 성읍리로 이배되었다.  

그리고 나주, 추자도, 광양 등으로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1805년(순조 5년) 4월

마침내 고난한 유폐생활이 해제된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28년간 계속된 길고 긴 귀양생활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805년 8월 관직에 복귀한다.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순조 11년(1811)  그 참혹한 구덩이 같았던 제주 목사를 자원한다.
그의 나이 환갑이었고, 홍윤애가 죽은 지는 31년 만이었다.

조정철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그리던 딸과 상봉하고,

그 길로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 정비한다.
그리고 그녀가 죽게된 경위와 애절한 추모시를 묘비에 남긴다.
 
        옥 같이 그윽한 향기 묻힌 지 몇 해이며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하랴
        황천길 아득한데 누굴 의지해 돌아갔을꼬
        짙은 피 깊이 간직한 죽음 인연으로 남았네
        천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리니
        한 집안 높은 절개 두 어진 자매였네
        아름다운 두 떨기 꽃 글로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 앞에 우거져 있구나.
 
그는 딸을 위해 뒤늦은 부정(父情)을 다 쏟는다.
또한 사랑하는 여인의 땅 제주를 위해서 많은 선정을 베푼다.
그리고 일 년 후 동래부사로 승진한다. 
그후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다.
 
그는 문집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에
1781년 홍윤애의 상여가 나가던 날의 참담한 심정을 적은 시를 남겼다.
 
      귤나무 우거진 성 남쪽 작은 무덤
      젊은 혼 천년토록 원한 남으리
      초장과 계주는 누가 올려줄까
      한 곡조 슬픈 노래에 눈물만 흐르네
     
자료: 한라일보 2012. 6. 11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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