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보리교회 외/갈보리교회 이필재목사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 - 2011. 12. 18

산넘고 물건너 2012. 1. 9. 14:59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

마태복음 16:13~20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

   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오늘 성경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자신에 대한 궁금증을 반영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물으시고 이에 대한 제자들의 몇 가지 대답이 나왔습니다.

만약 우리 몇 사람이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코끼리를 만져보고 그 감각으로 평가를 한다면 한 사람은 코끼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는 기둥같이 생겼습니다.” 다리를 만져보고 말한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코끼리는 벽과 같습니다.” 몸통을 만져보고 그렇게 답변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코끼리는 멍석 말은 것과 같습니다.” 코를 만져보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코끼리는 아주 작습니다.” 꼬리를 만져보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 경험을 가지고 일평생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고정관념이 생겼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우깁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감각기관이 가장 잘 발달한 손으로 확실하게 경험한 지식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절대 거짓말이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들으면 절대로 코끼리 모양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맞는 말이면서 틀리는 모순이 생겼습니다.

 

이 예화는 우리 예수님에 대해서도 똑같은 반응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 예화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반응이 몇 가지로 나왔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부분적으로 맞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모든 일이 세례 요한과 같은 성격이 많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메시야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 그에게 몰려가서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신 것이 아니냐?” 그래서 다 그에게 요단강에서 새로운 종교 예식인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면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요?” “나는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라.” 그리고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을 소개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세례요한과 한 일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말합니다.” 구약 시대 대표적 예언자가 엘리야입니다. 이 세상 태어난 모든 인간 가운데 죽음을 경험하지 아니한 사람은 엘리야 밖에 없지 않습니까? 갈멜산의 기념동산은 일 년 내내 순례자들이 그것을 보기 위해서 끊이지 않고 찾아갑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로서 엘리야와 성격이 아주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왜냐하면 일종의 국가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예레미야가 예언하는 것은 약간 매국노적입니다. “이 나라가 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자기 민족의 망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다 무너질 것이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여보시오. 이 성전은 46년 걸려 지은 웅장한 성전인데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길 바라다니 당신은 매국노요?” 예레미야와 예수님은 예언성이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그런 대답은 예수님을 실망시켰습니다. 부분적으로 다 맞는 말이면서 틀리는 모순의 대답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너는 누구냐?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네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밝히 말하라.”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의 신분이나 본질성에 대해서 묻는 질문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본질적 속성은 무엇인가? 왜 그때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그렇게 많이 했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하는 일을 보면 메시아적입니다. 그런데 그의 신분을 보면 나사렛 동네 가난한 목수의 아들입니다.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자니 하나님과 똑같은 일을 하고 그래서 예수를 바라보는 시각에 갈등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가 누구인가?” 저를 쳐다보는 어떤 여자 분이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면서 “어? 이 아저씨는 이필재 목사님 많이 닮았다.” 그러면 틀렸습니까, 맞았습니까? 부분적으로 맞았습니다. 잘 본 것입니다. 그러나 닮았다는 것은 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본질은 안다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인가? 그가 누구인가? 나더러 누구라 하느냐? 여기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오늘도 제자들마저도 이렇게 다양한 대답이 나왔습니다. 다른 방법은 우리가 알 수가 없고 성경이 그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예수님 자신이 어느 날 요한복음 5장 39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은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 “성경 보면 내가 누구인지 안다.”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했나? 그러면 예수님 속성의 본질성이 파악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부를 때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더 정확히 부르려면 “예수는 그리스도” 이렇게 불러야 합니다. “예수”라는 말은 인간 예수 표현의 자연인 이름이라서 제 이름이 “이필재”인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 정체성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설명을 하는 성경구절이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랬을 때 그 정답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아주 흥분하시고 좋아하시면서 “내가 너에게 천국 열쇠를 주겠다.”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를 믿지 않습니까? 누구인데 믿어야 되는 것입니까? 때로는 우리가 그 예수를 위하여 순교를 당하며 일평생 생명을 걸고 그 이름에 우리가 목숨을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누구기에 그렇게 합니까?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바라봤을 때 너무나도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믿기 어려운 부분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말하는 삼위일체 교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 속에 함께 계시느냐?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지! 하나님과 사람이 한 몸 안에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가 이런 방법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냐?” 바로 오신 메시야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영원한 유대인의 불행이 된 거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이 양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어떻게 영접을 해야 되는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가 있는데 제일 중요한 대목이 예수님의 신성 부분입니다. “메시야 부분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이것을 살펴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출생 때부터 신적 능력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이사야는 예수님의 출생을 보고 그의 이름을 “기묘자”라 했습니다. 기묘자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안 씁니다. 그 말을 풀이하면 불가사의한 일이란 말입니다. 지금 이 세계 역사에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7대 불가사의가 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이라든가 애굽의 피라미드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불가사의한 것이 되기는 하지만 절대 불가사의가 아닙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된 것이지 무슨 불가사의입니까? 너무 장엄한 일이라서 그것을 찬양하다가 보니까 편리하게 7대 불가사의라는 말을 쓰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절대 불가사의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기묘자라, 불가사의한 일이 되어졌다.” 그렇게 예언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사건의 가장 큰 사건이 부활의 사건입니다. 성경에는 몇 사람의 부활의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다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서 살아나서 잠시 더 살다가 또 다시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한번 살아나고 다시 죽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도 인류 역사에 없습니다. 한 역사가가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이 세 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것, 하나님이 인간의 손에 의해 죽으신 것, 죽었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 이 세 가지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도 모르게 골방에서 돌아가셨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유대 나라 역사에 예수님 시대까지 사람이 한 곳에 가장 많이 모인 사건이 예수님의 갈보리 사건 때입니다.

세계에서 사람의 손으로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의 ‘글렌데일 포리스트론’이라고 하는 곳에 있습니다. 관광지입니다. 그 그림을 보러 세계에서 다 찾아옵니다. 그림 길이만 71m입니다. 그 그림을 보관하기 위해서 건물이 하나 지어져 보관되어 있고 오는 사람들에게 모두 다 설명해 줍니다. 무슨 그림이냐 하면 예수님이 갈보리 언덕 십자가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림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역사 가운데 한곳에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일 때가 이때 밖에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거기서 죽으셨지 않습니까? 그 확실한 사건이 부활로 연결되었습니다. 확실히 죽으시고 확실히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 대기권이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가 땅에 이렇게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기권 안에서 자연 과학의 원리는 아주 작은 물체라도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몸은 대기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했는데 이 사건이 5천년, 6천 년 전의 일이 아니고 인류의 역사 가운데 아주 짧은 2천 년 전 사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서에 기록하기를 “그 당시 현장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을 바라본 사람들 가운데 지금까지 태반이 살아있도다. 5백여 성도가 모여서 그 사실을 목격했는데 250명 정도는 아직도 살아있으니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될 거 아니냐?” 저는 예수님 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TV가 있었다면 예수님이 생방송으로 매일 같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가장 관심 있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세상에 이런 일이”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세상에 이런 일이”입니다. 그 다음에 “그것이 알고 싶다.” 그런 순서로 365일 예수님만 따라다니면서 취재하여도 기사 거리가 넘쳤을 거 같습니다. 예수님 밖에는 할 수 없었던 나타난 사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성 신성이 확실하게 나타남으로 우리는 예수 안에 계시는 메시야를 지금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2천년이라면 인류 역사 가운데 근래 역사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현실감 있게 목격한 사실을 어떻게 하느냐? “그것을 보고도 보지 않았다고 거짓말해야 되느냐?”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 나라 사람들은 갈등이 온 것입니다. “하는 일의 성격은 메시야적이다.” “이 사람 말고 다른 메시야가 왔을지라도 이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가 없다.” 성경에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아들이거든요? “이것을 어떻게 믿느냐?” 이래서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에게 기적 사건이 많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본래 이 기적이라고 하는 단어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위대하고 장엄한 내용도 실제는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을 찬양하다 보니까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 “나인강의 기적을 일으켰다.” 이런 말을 우리가 편의상 찬양하기 위해서 쓰는 것뿐이지 인간의 손으로 하는 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다 인간의 손으로 했지 않습니까? 기적은 인간의 손으로 절대 할 수 없는 일의 출현입니다. 그래서 이 기적은 하나님 편에서만 있는 것이지 인간이 하는 일은 실제로 기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다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불가능성의 회복, 환자 치유 사건, 생명 소생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자연 과학을 뛰어넘는, 지금 현재 21세기 문명권에서 살고 있는데 이렇게 발달한 현대 의학으로도 전혀 고칠 수 없는 질병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불치의 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신경이 다 말라붙어서 도저히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현장 치료를 다 받았습니다. 의학으로 설명해 보란 말입니다. 설명을 절대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불가사의입니다.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소록도에 5번이나 가서 집회를 하고 관계성을 가지고 늘 거기에 다녔지만 내가 거기 갈 때마다 목사님께 늘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이곳에서 이렇게 20년 동안 목회를 어렵게 하시는데 이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이것이 치유가 되어서 정상적으로 건강이 회복된 사람이 있나요?” 없습니다. 어디 가서 물어봐도 없습니다. 치료 된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치료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열 명의 한센 병자를 모두 현장 치료해 주셨지 않습니까? 이것을 뭐라고 말합니까? 기적입니다. 이런 일을 누가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는 일을 보아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요셉의 아들 목수인 것입니다. “이걸 어떡하느냐?” 그래서 많이 질문한 것입니다. “당신이 누구야? 우리에게 밝히 말하라.” “내가 말했느니라.” 불가능성의 회복을 신적 능력으로 된 것을 의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합니까?

베다니의 나사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모두 다 죽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현장에서 다 살려내셨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는 예수님과 나사로와 제자들만 있었으니까 베다니 마을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보는 가운데서 “나사로야, 일어나라.” 그 동네 사람들이 다 장사지내고 무덤에 갔다 넣었는데 살아 나왔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사건에 대해서 현장 목격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말입니다. 이런 것이 기적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회당장이면 권세가입니다. 그 집의 딸이 죽었으니 이것은 신하들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회당장을 위로하는데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라.” 제자 셋을 데리고 들어가서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장례식장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면 과학적으로 설명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것이 예수님과 베드로, 안드레 이렇게 두어 사람이 그렇게 했다면 모두 다 꾸며낸 이야기라고 하겠지만 그 동네 사람들이 다 본 것이니 어떻게 하느냐 말입니다. 초능력적 신성 능력의 표현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얼마든지 설명을 하지 않습니까?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열두제자와 몇 사람이 먹었다면 “저 놈들 거짓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숫자를 밝힌 것입니다. “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만 오천 명이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 그러면 자기들이 신체적으로 배가 부른 것을 어떻게 하느냐 말입니다. 없던 것이 있어졌는데 어떻게 하느냐 말입니다. 다 먹고 남았지 않습니까? 어떤 목사가 이 설교를 하도 흥분해서 보리떡 5천개로 열두 명을 먹이고 남았다고 말했다고 하던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현장에서 얻어먹은 사람은 거짓말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도시락을 바친 어린아이는 아마 일평생 두고두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거 내 도시락으로 예수님께서 기적 일으키신 거야.” 아마 가문의 영광이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 기적 사건 일으킬 때 성경 기록은 뭐라고 합니까? “물 떠온 하인들만 알더라.” 목격자들만 알았다는 겁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모든 기적 사건이 거짓말로 꾸며낸 이야기라고 믿든가, 아니면 사건의 주인공 되신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믿든가! 간단합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 광풍이 갈릴리 바다를 쳤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광풍이 없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5천년동안 그런 광풍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국에서 살 때 이런 것을 많이 만났습니다. 텍사스에 한번 광풍이 지나가면 스테이션왜건 같은 무거운 자동차들이 100m씩 날아가 버립니다. 집이 불도저로 밀어버린 것처럼 다 박살납니다. 무슨 바람인지 모릅니다. 아열대 기후에서 찬 공기와 더운 공기의 만남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하는데 보통 무서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해마다 100만 명에서 200만 명이 이 광풍 때문에 피난을 갑니다. 죽는데 어떡합니까? 갔다가 안전한 시기에 돌아옵니다. 해마다 똑같습니다. 저도 그런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기후가 바로 그런 기후였기 때문에 어쩌다 일어나는 이 광풍이 한번 때리고 지나가면 살아남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 천재지변 사건 앞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바다여! 잔잔하라.” 하셨을 때 잔잔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가 뉘기에, 당신의 본질성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말을 했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들의 질문이 거기에 있습니다. “당신이 누구이기에 내가 내 이 고귀한 인격과 내 생명 전체를 다 당신에게 바쳐 걸고 살아야 됩니까?” 그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에 대한 본질에 대해서 믿게 되었다. 나의 삶의 목표는 이거 하나 밖에 없다.” 그래서 성령 충만해진 성도는 삶의 가장 큰 목표와 행복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아! 나는 내 진리를 찾아서, 삶의 본질을 찾아서, 나는 이것을 위해서 누가 무엇을 무슨 소리를 해도 이 본질성에 대해서 나는 확실한 믿음이 생겼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은 전파되고 지금도 생명을 걸고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가 오신 것입니다. 성경말씀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한 줄 아노라.”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왜 그런 증거가 나왔습니까? 본질성에 대한 믿음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메시야입니다.” “너는 천국 열쇠를 가질 자격이 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두 가지 중 하나만 선택하면 됩니다. 당시에 예수를 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가족들까지도 그랬습니다. 미친 사람으로 믿든가, 아니면 메시야로 고백하든가 둘 중에 하나로 선택하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인류의 구원자가 오셨다” 이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성탄이 정말 기쁘고 행복한 성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아직 살아나지 아니했을 때 그 무덤 앞에서 마르다,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했을 때 뭐라고 대답합니까?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너의 오빠가 살 것이다.” 그러고 나서 살려내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주일에 여러분! 예수는 나와 어떤 관계인가? 그의 본질성은 뭔가? 속성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신앙 고백을 확실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나와 무슨 의미인가? 그가 누구인가? 예수님 때부터 지금까지 이 문제는 계속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모두의 영혼에 문을 열어주셔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이 분명할 수 있는 영적인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1.12.18 갈보리교회 이필재 목사님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