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보리교회 외/갈보리교회 이필재목사 설교

인간이 되신 하나님 - 2011. 12. 25

산넘고 물건너 2012. 1. 4. 08:13

 

인간이 되신 하나님

빌립보서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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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의 생일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날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되셨는가? 이 문제 때문에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신학적 논란이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초대교회 때 영지주의라는 파와 노스틱 사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부분을 부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같이 보였지만 신성 부분만 있었던 것이지 인성은 없던 것이라고 주장해서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복음은 이 문제를 철저하게 해결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제가 예수님의 신성 부분을 설교했는데 오늘은 인성부분입니다. 요한복음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그렇게 긴 족보 이야기로 성경을 시작했는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간 역사 속에 참여하신 인간으로 오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됨의 조건 아래서 사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예수님의 인간됨의 증거 기록이 그렇게 많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인간됨의 첫째 조건인 출생 과정을 하늘에서 그냥 내려오지 아니하시고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보통 아기들의 출생 과정을 똑같이 경험하셨습니다. 다윗의 가문에서 나셨으므로 인간의 족보 중의 한 사람으로 혈통 조직에 참여하시고 지금 시대라면 예수님도 주민등록증을 내셔야 됩니다. 운전면허증이 있으셔야 다니시고 호적등본 떼라고 하면 뗄 수 있는 인간조직에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인자’라는 말을 복음서에 77번이나 사용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의 아들이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인간의 성장 과정을 그대로 가지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2장 40절과 52절에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거기 있더라.” 12살 되었을 때 누구나 다 가는 유월절 행사에 참여해야 됨으로 부모를 따라서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왔다 가신 기록을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노동자 일을 하셨습니다. 아마 요셉이 장사하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도 시장에 나가서 아버지의 가업을 도와서 장사를 하셨을 것입니다. 요셉이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도 아버지를 따라서 농사를 짓는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직업이 목수였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 일을 도와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났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4장 6절에 보면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라고 나와 있습니다. 일을 하면 우리 육신은 피곤이 필연적으로 찾아옵니다. 예수님도 피곤하셔서 우리와 똑같이 쉬셨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배고프신 기록은 성경 여러 군데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4장에 “금식 기도 후에 주리신지라.” 인간이기 때문에 배고픈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또, 배가 고프셔서 무화과 열매를 얻을까 하여 나무를 찾아가신 기록도 나오고 더군다나 예수님의 별명이 하나 성경에 생겼는데 바리새인들이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식사를 아주 즐겁게 잘하신 모습을 우리가 넉넉히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 인간은 일정시간 잠을 자야 하는데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갈릴리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 소란을 피울 때 예수님이 얼마나 피곤하신지 “그 소란 속에서도 배에서 주무신지라.” 잠이 필요할 때는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잠을 자야 되는 인간의 육체적 조건 속에 예수님도 똑같이 계셨음을 우리가 성경에서 밝히 알아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화를 내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또 돈 바꾸는 사람들 상을 엎으시며 의분을 발하신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고민도 하셨습니다. 슬퍼하기도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고 슬퍼하사” 인간 감정 안에 예수님도 똑같이 계셨음을 나타내 주는 기록입니다. 마지막에 인간들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이 가는 길을 마지막 죽음으로 끝내십니다. 이렇게 다 되어 있습니다. 인간 과정 안에 그대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복음서에 확실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똑같은 죄는 없으십니다. 요한복음 8장 26절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잡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라도는 뭐라고 합니까? “나는 그에게도 아무 죄도 찾지 못했노라.” 그렇게 말하고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 보면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괴사도 없으시며” 요한일서 3장 5절 “그가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이 하나가 다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 구원의 완성자가 될 수 있었음을 성경은 우리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되겠는가? 예수님과 같이 살아가면 됩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시나” 본래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셨고 사람 중에서도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자기를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최초로 죄를 지을 때 왜 지를 지었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언제나 인간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파렴치하게 손을 내밀어서 하나님의 권위에 손을 대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한 생각이 죄의 기초가 된 것을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자리로 오셨는데 어느 날 보면 사람들이 파렴치하게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간혹 우리 사회도 흔하게 나타납니다. 무슨 능력의 종이니 신유의 종이니 무슨 계시를 받았느니 하면서 자기를 특별 취급하고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행동합니다. 사람이 사람 되지 않고 하나님 되고자 할 때 마귀가 됩니다. 보십시오. 우리나라에도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되고자 했던 이단 교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다 자칭 예수입니다. 이단 교주가 가장 성공을 많이 할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얼마나 많은지 이단 문제 연구소 탁명환 연구 위원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재림 예수만 수십 명이 됩니다. 문제는 내가 예수라고 말하는 그 사람을 예수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성공하려면 이단 교주가 되면 되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제 주변에 은퇴하신 목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우리 원로 목사님과 친한 친구 분이신데 미국에서 나와 같은 지역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들려주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목사! 내가 전도사 생활 하던 때 목사님 한분을 잘 아는데 그분이 병원에 입원을 하셨어. 잘 아는 처지라서 이런 때 내가 심방을 좀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심방을 갔더니 침대에 누워서 많이 고생하며 앓고 계시더군. 그래서 목사님! 얼마나 고생 되십니까? 그러니 괜찮다고 하시는 거야. 목사님! 제가 왔는데 기도해드릴까요? 말씀드렸더니 허허허! 이 사람이 주님을 보고 기도를 해주겠다니!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기도도 못하고 나오면서 생각하기를 ‘주님도 병원에 입원을 하시나?’ 그렀었답니다. 여러분! 부탁드리는데 하나님 같이 구는 분께는 가까이 안 가시는 것이 신앙상 좋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인간의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보십시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심방 갔을 때 고넬료 집안에서 이 베드로를 하나님과 같이 취급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베드로가 거북스러워서 “나도 사람이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성경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북하게 굽니까?”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어서 설교를 하니까 그때부터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기독교의 복음은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 세계로 가는 첫 관문이 그 집안에서 열리기 시작하는 축복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저는 2천년 역사 동안에 주님을 위해서 가장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을 언제나 바울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멜리데 섬에 파산되어서 거기 구원을 받았을 때 그 토인들이 와서 바울에게 나타난 기적 사건을 보고 놀라서 뭐라고 합니까? 신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날이 추우니까 거기에 나무를 갖다놓고 모닥불을 치우고 배에서 풍랑을 만나서 옷이 젖은 사람들이 거기서 옷을 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덤불 속에서 뜨거우니까 독사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바울을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네 사람들은 “아! 저 사람은 정말 죄인이다. 바다에서는 구원받았지만 결국 신의 뜻이 저 사람은 죽어야 되는가 보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뱀 한 마리도 없습니다. 저는 캘리포니아에 오래 살았는데 그런 뱀은 무서운 사막 지대에 사는 뱀입니다. 한방 물리면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보통 무서운 게 아닙니다. 사막에 득실득실합니다. 그 뱀에 물렸단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뭐가 붙었어?” 하고 떼어서 불 속에다 슬며시 집어넣고 태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은 바울을 볼 때 “이 자는 사람이 아니다. 이 섬에서 저 뱀에 물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아있는가?” 그래서 “신이라 하더라.” 그러며 신적인 추앙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적인 추앙을 받는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 나는 죄가 어찌나 많은지 제일 죄 많이 지은 사람이 나입니다. 꼴찌 인생입니다. 얼마나 꼴찌이냐면 만삭 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 같은 나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이 차야 되는데 나는 7개월 밖에 없었던 모자라는 인생입니다. 나는 그렇게 못난이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를 들어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사역자로 세워서 오늘 우리가 바울서신을 보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아주 휴머니티하셨습니다.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여유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폭넓은 인간관계는 바리새인들의 비난거리가 되었습니다. “너희 선생은 왜 날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다니느냐?” 예수님은 “다니면 어때?”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창녀 여자를 왜 데리고 다니느냐?” “데리고 다니면 어때?” 그가 발 씻는 행위를 놓고 다른 사람들은 막 비난했지 않습니까? “이가 선지자였다면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이 일을 온 세상에 다니며 복음과 같이 전하라.”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다른 사람들은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살인강도가 살인 당하는 현장에서도 흉악범의 요청을 들으신 예수님이 “야! 이 얌체 같은 놈아! 평생 못되게 굴다가 죽을 때가 되니까 회개하느냐?” 그러셨습니까? 다른 설명 하나도 하지 아니하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휴머니티는 끝이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임하셔서 낮은 자리에 있는 모든 인간의 손을 잡고 하나님 나라의 인도하는 구원의 메시야! 그래서 우리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 오늘 그래서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저는 자연 광경을 보고 감탄한 곳이 몇 군데 있는데 제일 감탄한 게 뭐냐고 가끔 질문을 받습니다.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브라질 3개국 국경에 있는 이구아수 폭포라는 것을 제가 가장 감탄했습니다. 나이아가라도 가봤지만 그것은 10분의 1 정도 밖에 안 됩니다. 365일 어디서 그렇게 물이 많이 나오는지 태산이 무너지는 거 같습니다. 계속 물이 흐릅니다. 그 장엄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갔을 때는 홍수가 나서 안내하시는 분이 참 좋은 때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아르헨티나를 돌아서 일부러 구경을 많이 했습니다. 나이아가라나 이구아수 폭포에 가면 가장 아름다운 신기한 광경이 무지개입니다. 햇볕이 나는 날은 언제나 무지개가 뜹니다. 사람들이 무지개 속에 들어가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옷이 젖으니까 우비를 하나씩 쓰고서 거기 들어가는 체험을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무지개가 항상 있을까?’ 무지개의 원리 때문입니다. 그렇게 산더미 같은 육중한 물이 쏟아질 때는 안 나타납니다. 그 태산 같은 물이 수백 미터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러면 그 아래는 다 바윗돌입니다. 그래서 물은 바위에 부딪혀서 산산조각이 나서 가장 작은 물방울인 수중기로 변합니다. 그 산더미 같은 물은 아래로 흐르고 떨어지게 되어 있지만 가장 작은 물체가 된 수증기는 물이 위로 올라갑니다. 물이 자기 몸을 떨어뜨려 부수고 또 부수고 수증기로 변화시켜서 형체를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정도의 작은 몸으로 변할 때 그 몸은 하늘을 향해서 올라가고 아울러 그 몸이 햇볕이 닿을 때 찬란한 무지개라고 하는 빛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 앞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낮고 낮은 인생의 자리로 떨어지고 깨어지고 분해가 되어 버릴 때 내 영혼의 수정 같은 물체는 하늘을 향하여 떠오르게 되어 있고 그 떠오르는 내 영혼의 물방울에 성령의 강렬한 빛을 비추어줄 때 그곳에서 무지개 같은 찬란한 내 인생에 광채가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인간 고난에 참여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을 아십니다. 누구보다도 인간을 잘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리를 낮추시고, 낮추시고, 또 낮추시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그래서 우리는 오늘 나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향하여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름의 은총이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인간 구원을 위해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저희들이 축하드립니다. 모두의 영혼 가운데 주님과 같이 살려고 하는 영적인 결단을 허락해 주시고 내 인생의 무지개 같이 아름다운 빛이 성령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를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11년 12월 25일 이필재 목사 주일 예배 설교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