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북한 평양 지방의 기독교 신자들을
남한 방방곡곡으로 흩어 놓았다.
서귀포에서 동쪽으로 4km 떨어진 조그만 우리마을에도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목사만 7명에 달했다.
그들은 향사와 학교 건물 등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어느정도 규모가 갖춰지면서
그해(1951) 9월 교회를 건축하였다.
내가 3살 때였다.
1951년 12월의 어렴풋한 기억..
교회 음악대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동네를 한 바퀴 돌아다녔다.
처음 보는 신기한 볼거리에
동네 꼬마들은 음악대를 졸졸 좇아다니며
신이 났다.
저녁에 예배당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무대에서는 석유등불 조명 아래 성극과 합창이 공연되었다.
20여평 예배당은 흙바닥에 긴 널판자 임시의자가 가로질러 놓여 있었고,
나도 누눈가의 손에 이끌리어 뒷자리에 서서 공연을 구경하였다.
그러나 가장 뚜렷한 기억은 종이 봉지에 담아 나눠준 달콤한 사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