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2020. 6. 23 <오후여담> 이미숙 논설위원
38선은 남북 분단의 상징이자 6·25전쟁의 상징이다.
해방 후 서울·평양에 각자 정부가 수립되며 38선은 접경선이 됐고, 1950년 6월 25일 남침 후 1953년 7월 27일 휴전하기까지 38선을 넘나드는 피의 전선이 됐다.
중공군 참전으로 38선 부근에서 교착상태가 이어지자 당시 미군 병사들 사이에선 “비기기 위해 죽어야 하나(die for a tie)”라는 냉소적 표현이 유행했다고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의 저자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기록했다.
한반도 분할에 대한 연구는 많이 나와 있지만, 1945년 8월 10일 러시아가 남하하기 시작했을 때 미군 전략회의에서 30분 만에 한반도를 반으로 가르는 38도선이 그어졌다는 게 대체적인 정설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부관이었던 에드워드 로우니(1917∼2017) 장군은 당시 전략회의 목격담을 회고록 ‘운명의 1도(2013)’에서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회의에서 딘 러스크 대령은 평양 밑인 북위 39도선을 주장하면서 근거로 “한반도에서 폭이 가장 좁아 방어가 용이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에이브 링컨 장군은 “세계 최고의 문학과 발명품 90%는 38도선 북쪽에서 창조됐다”는 니컬러스 스파이크만 예일대 교수의 저서 ‘평화의 지리학’을 언급한 뒤 38도선을 주장해 그렇게 결정됐다.
로우니 장군은 “39도선으로 결정했다면 방어가 쉬웠을 것이고 수많은 미군 생명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돌이켜보면 큰 실수였다”고 기록했다.
일본의 원로 한반도 연구가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게이오(慶應)대 명예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39도선으로 결정됐다면 6·25전쟁도 없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오코노기 교수는 지난해 출간한 ‘한반도 분단의 기원’에서 “39도선은 제정 러시아가 일본에 제안했던 선”이라면서 “실제 소련군 사령부는 평양 점령 전까지는 함흥을 북한의 중심도시로 여겼고 남포항 접근권만 보장된다면 소련이 굳이 39도선 설정에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39도선 획정에 성공했다면 김일성이 북쪽에 ‘민주기지’를 건설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남침을 허용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미국이 39도선을 택했다면 6·25 남침은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다. 그 1도의 차이 때문에 수많은 이들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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