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보리교회 외/갈보리교회 이필재목사 설교

성전 문지기를 소원한 왕

산넘고 물건너 2013. 11. 9. 13:27

성전 문지기를 소원한 왕

시편 84:1~12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편 84편은 설교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본문입니다. 저는 그동안의 설교록을 보니까, 이 본문으로는 오늘 처음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 맨 처음을 보면 시편 84편의 성격을 말해주는 제목이 조그만 글씨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라 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누구인데 왜 성경에 적혀있는가?

구약 성경 민수기 26장에 보면 고라의 무리들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이 어쩌다가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하나님을 반역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250명이 땅 속에 매몰되어 모두가 죽었다는 끔찍한 사건 기록이 나옵니다.

그때 그들의 자녀들은 아주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장했을 때 자신들의 조상이 왜 그렇게 끔찍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했는지를 목격하고 마음이 새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조상과 달리 하나님께 가장 훌륭한 삶을 살아가자고 결심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실 수 있으실까? 성전 중심의 삶을 살자.’ 그래서 성전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삶이 가장 좋은 삶이라 생각하고 정한 것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지금 우리 문화로 말하면 성가대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손들은 집단으로 “우리는 다 성가대원이 되자.”고 하여 찬양대원이 되었고, 또 하나는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지키는 성전 문지기 역할을 하면서 살자고 결심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성가가 될 만한 시를 수집해서 거기에 곡을 만들어서 노래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시편 84편도 그 중의 하나로 “고라 자손의 시”라고 밝힌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혹은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이런 기록이 또 옆에 붙어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이것은 지휘자의 역할을 말한 것입니다.

“자신을 눈에 띄게”라고 해석이 가능한데 지휘자를 보면서 그의 지휘에 맞추어 부르는 합창곡, 또 어떤 때는 독창자가 있어서 솔리스트를 돋보이게 부를 수 있는 성가곡이 되는 합창곡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라 자손은 과거 조상들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성가 사역을 열심히 잘했는데 84편의 이 시는 원작자가 다윗입니다. 다윗이 남긴 시에 곡을 붙여서 합창곡으로 불렀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어느 때 이 시를 남기게 되었는가? 그의 생애에 가장 괴로운 시간을 만났을 때입니다.

구약 성경 사무엘하 15장을 보시면 다윗의 일생에 가장 처참한 모습의 기록이 나옵니다. 거기 보면 두 사람의 배신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가 아들 압살롬의 반역입니다.

다윗의 아들은 열 명입니다. 자연히 왕권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들 중에 가장 야심이 많은 사람이 '압살롬'이었습니다. 가만히 상황을 돌아보니까 아무래도 아버지가 자기에게 왕권을 줄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본처의 소생이 아닌 첩의 아들 솔로몬에게 왕권을 계승했습니다.

압살롬은 쿠데타를 일으켜서 절반의 성공을 했습니다. 그는 헤브론에다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군대를 이끌고 아버지가 있는 예루살렘 궁중을 향해 필사적으로 진격을 했습니다. 혁명군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거리는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제 세상은 다윗의 시대가 지나고 압살롬의 것이다. 그에게 붙지 아니하면 살아남기 힘들다.”

이렇게 되니까 다윗에게 더 불행한 일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다윗 왕의 정책 자문으로 최고의 실제적 힘이 되어주던 아히도벨 장군이 다윗을 반역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에게 협조해서 자기 살 길을 재빠르게 찾는 바람이 다윗은 결정적 몰락을 맞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아들이나 심복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도망을 가는 창피스러운 역사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때 성경 기록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 15장 13절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랬더니 14절에 보면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 아들의 칼에 맞아 죽게 된 형편이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30절에 내려가면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창피하니까 얼굴을 가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급해서 신발도 못 신고 맨발로 엉엉 울면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감람산으로 도망을 가는 기록이 나온 것입니다.

아마 다윗 일생에 최고 괴로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상실한 초라한 거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위대한 점이 뭔가? 그러한 자기 환경에서도 하나님과 연결하는 영적 능력을 절대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이때도 주께서는 나와 함께 계심이라.” 이것이 다윗의 모습입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상실하고 조용히 자신을 살피는 QT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이때에 84편 이 시를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가장 슬픈 조건이 무엇인가? 왕권을 아들에게 빼앗긴 것인가? 궁중의 화려한 시간을 상실한 슬픔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그는 가장 슬픈 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상실한 것을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84편 노래는 고라 자손이 다윗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드는 영장으로 맞추어 불렀습니다. 주로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오다가 성전에 거의 도착하면 그 성전 뜰에서 성전을 바라보면서 너무 기뻐서 부르는 합창곡이었습니다. 성전을 쳐다보면서 “만군의 여호와여 이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성전 사모곡으로 불렀습니다.

또 제사장들이 성전 출입을 할 때 성전 뜰에서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전에 있다 하오니 우리를 살피소서.” 하는 제사장들의 합창곡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솔로몬 이후는 성전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윗이 그리워하는 성전은 천막입니다. 수달피 가죽을 꿰매어 만든 천막 성전으로 성막이라고 보아야 더 좋은 초라한 곳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천막 성전이 자신의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거기 가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대로 다윗의 생애는 다양한 문화를 가졌던 생애였습니다. 어린 시절은 목동으로 지냈습니다. 유목민 생활을 하다가 블레셋과의 전쟁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골리앗을 때려눕히는 것을 시작으로 절대 영웅의 자리에 올라서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말을 국민들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래서 개선장군의 영광을 한 몸에 지니는 젊은 청년이 되었고 마침내 30세가 되었을 때 왕위에 올라서 부와 권세와 향락을 모두 누린 사람입니다. 자신의 말로 표현했습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다 누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제 다 잃어버린 자리에서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가?

가장 그리운 것이 주의 장막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음대로 갈 수 있었던 주의 성전에 내가 드나들 수 없는 지금이 가장 슬프다.”

사실 그래서 하나님은 끝까지 다윗을 살려내시고 보호하신 것입니다.

 

아마 성도 여러분도 과거에 누린 것 중에서 그리워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렸던 과거가 있는 사람들이 항상 입버릇같이 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과거가 없는 사람들은 지금이 제일 좋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세계 흐름을 평가하는 목회자들이 가끔 예언자적 소리를 발하고 있습니다. “21세기는 온 세계가 이제 다시 보수주의와 영적 회복이 가능한 시기가 될 것이다.”

그 이유는 20세기는 인류가 갈 때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가장 많은 전쟁으로 가장 많은 피를 20세기에 흘렸고, 가장 타락한 시대도 20세기이며, 하고 싶은 일은 모두 다 행해도 좋다는 그런 시대를 20세기에 살았는데, 거기에서 인류가 얻은 결론이 뭐냐? 허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쟁을 많이 했는데 무엇을 얻었는가? 사람 죽인 거 밖에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독일, 영국, 일본 그렇게 많은 침략을 해서 영토를 많이 확장했는데 지금 남은 것은 죄책감 밖에 없습니다. 독일 청년이 남의 나라에 가면 언제나 전쟁 기념관에 가서 무릎 꿇고 회개하지 않습니까? 허무 밖에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향락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막지 않았는데 결론은 가정 파괴 문화밖에는 가져온 것이 없다. 갈 데까지 다 가면 더 갈 곳이 없다는 허무감에서 돌아오는 인간 심리, 이것이 20세기에 이루어질 것이다.” 저도 거기에 동감합니다.

 

이제 다윗의 성전 사모곡 1절을 보면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이 표현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상태의 감탄사입니다. ‘아! 너무 예쁘고 너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구나.’ 여러분! 무엇을 보고 어떤 대상을 보고 그런 마음을 가지십니까? 사람마다 그런 것이 다 다릅니다.  

로스앤젤레스는 기후 때문에 일 년 내내 골프 인구가 많습니다. 골프장도 많고 골프 치는데 한국처럼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라서 하고 싶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안 해봤기 때문에 그 재미를 도저히 느낄 수 없는데 교인들이 어느 날 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행사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담임목사배 골프대회”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나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새벽 4시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서 간단히 예배를 드렸는데 새벽 4시에 나갔는데 한 100명 정도 나오신 것입니다. 저는 그때 느낀 것은 성전 건축 한다고, 또 고난주간에 새벽기도 한번만 나오라고 해도 안 나오던 사람들이 거기 나와 계셨습니다. 아마 그 분들은 “이 골프가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이렇게 표현하시는 분들인 것 같습니다. 골프만 친다면 다 나오시는 것입니다.

식도락가는 맛있는 음식만 찾으면 경비는 문제가 안 되고 거리도 문제가 안 됩니다. 저는 갈보리교회 부임하고 몇 달 만에 우리 남선교회 회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차를 탔는데 여기서 어디까지 먹으러 갔느냐 하면 춘천까지 갔습니다. 가서 무엇을 먹었느냐면 막국수를 먹었습니다. 아주 맛있었습니다. 모두들 “어찌 그리 맛있는지요?”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기 마음에 행복이 되는 조건을 찾으면 바로 그런 감탄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한 20년 전 일로 기억이 되는데 주례를 하도 많이 해서 특이한 주례는 기억에 남습니다. 어느 날 하얀 장교복을 입은 미국 군인인 한 청년이 번쩍번쩍 하는 계급장을 달고 제 사무실에 찾아왔습니다. “제가 결혼하는데 주례를 해주십시오.” “왜 저한테 주례를 해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제 신부가 한국 여자입니다.” 그러니 결혼해서 행복하게 산다는데 우리 교인은 아니지만 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신붓감을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데리고 왔는데 저는 신부 엄마인줄 알았습니다. 신랑은 27살인데 신부는 52살입니다. 그럴 때 의심이 가면 목회자는 사인해주고 나중에 문제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 결혼이 사기일수도 있기 때문에 제가 확인을 받고 주례를 해주었습니다. 자세히 물어보니 신랑은 초혼이고 신부는 세 번째 결혼이었습니다. 신부는 두 번 결혼해서 고생을 많이 했는지 얼마나 팍삭 늙었는지 할머니 같았습니다. 제가 결혼 주례하면서 “당신은 이 여자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며 살겠느냐?” 물었을 때 ‘아니요.’라고 대답하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신랑을 보면서 ‘얘가 미쳤나?’ 이런 생각이 막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랑은 얼굴 표정이 행복하고 어찌 사랑스러운지 그 자체입니다. ‘이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수달피 가죽으로 꿰맨 먼지 앉은 그 성막 궁중에 사는 사람이 뭐가 그립습니까? 그런데도 감탄사를 써가면서 “어찌 그 사랑스러운 예배당에 내가 못 가는가?” 이것이 다윗의 가장 큰 슬픔인 것입니다.

 

2절은 뭐라고 합니까?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하고 싶은 일을 못하면 병이 납니다. 보고 싶은 사람 못 보면 쇠약해지게 됩니다. 다윗은 지금 예배당에 못가서 몸이 병이 났다는 것입니다. 한국식 냉면이 그리워서 아이다호에서 10시간 운전하고 와서 사먹고 간 사람이 있습니다. 저하고 같이 먹었습니다. 남북 이산가족들의 소원이 뭡니까? 헤어진 가족 다시 한 번 만나보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아주 오랜 제 친구가 시집을 하나 냈다고 선물해주는데 눈물이 글썽입니다. “이 목사님! 이거 읽어보면 내 심정 알겁니다.”

책 제목이 “그리움의 이쪽에서”,  어머니가 북한에 계시거든요.

“그 산이 아무리 높더라도 그 산 너머에 당신이 계시다면 그 산을 넘으련만

 그 바다가 아무리 넓더라도 그 바다 건너에 당신이 계시다면 나는 그 바다를 건너가겠소.

 그 길이 아무리 멀더라도 그 길 끝에 당신이 계시다면 그 길 끝까지 나는 걸어가겠소.

 나의 그리움인 어머니는 만날 수 없기에 그리움의 이쪽에서 당신을 이렇게 애처롭게 부릅니다.

 어머니, 그립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간절한 사모곡 하나씩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게 되어있는데 그것이 다윗에게는 성전입니다. “이것만 잃지 않으면 나는 돼.”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을 이렇게 부릅니다.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 말씀을 제일 이해 잘하실 분들이 이산가족들입니다. 이산가족들은 가끔 가다가 삼팔선 철책선에 갑니다. 하염없이 북쪽을 바라보면서 가로막힌 철책 담장을 원망하는데 그 뒤에 살고 있는 많은 새들은 아무 검문도 없이 훨훨 날아서 북한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때 그 새들이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교회 봉사 많이 하는 집사님들에게 저는 사진 많이 찍어두라고 늘 권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사진 한 장이 자녀 교육에 결정적 이유가 되었던 목회 경험 때문입니다.

엄마가 피아노 반주였습니다. 어린 딸이 교회에서 피아노 치는 엄마에게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면서 빨리 집에 가자고 하는 것을 누가 옆에서 찍어서 주었습니다. 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가 그 사진을 그 아이에게 보여주었더니 이 여학생이 그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것입니다. ‘엄마가 이렇게 교회 봉사하면서 나를 키웠구나.’ 그 사진 한 장이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교육이 되었습니다.

또, 시골 교회 건축할 때 벽돌로 했지 않습니까? 엄마가 몸빼 바지를 입고 머리에 벽돌 수십 장을 입은 언덕을 땀을 흘리면서 올라가는 사진이었습니다. 아들 셋이 있는데 엄마가 그들이 청년이 되었을 때 그 사진을 내어놓으니까 그 사진을 보고 감동이 되어서 세 아들이 장남은 그 교회 장로가 되었고 막내는 목사가 되어서 저와 같이 일을 했습니다. 그 사진 때문에 되었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젊은 시절에 세 아들을 키우면서 이렇게 교회 봉사를 하셨구나.’ 지금 다윗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4절을 부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이렇게 말합니다.

성전에 늘 있고 말씀을 늘 읽는 사람은 가치를 모르게 되어있습니다. 없어보십시오. 다윗은 지금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성전을 드나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를 드렸던 옛날이 너무나 그리워 견디지 못하는 병이 나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히스기야 왕은 병이 들어서 성전에 갈 수 없게 되자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침상에 누운 채 기도를 드리는데 머리를 성전 쪽으로 향하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바벨론에 잡혀간 유대 소년들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 쪽을 향하여 머리 숙여 기도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 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저주하면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지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전 중심의 삶의 모습입니다.

장사를 너무 잘해서 돈을 잘 버는 집사님이 한분 계셨는데 “목사님! 나를 위해서 한번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심방 오십시오.” “알겠습니다.” 나를 태우고 여기서 부산까지 가는 거리를 몇 시간 갔습니다. "여기 왜 오는 겁니까? “목사님!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분은 길거리에 돈이 보인다는 말을 하실 정도로 사업을 잘하시고 돈을 잘 버십니다.

"여기에 굉장히 내가 일하고 싶던 사업터가 하나 생겼는데 너무 조건이 좋습니다. 목사님이 보시고 축복기도해주시면 내가 하겠습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조건을 말하는데 저도 부러울 만큼 돈이 금방 생길 거 같았습니다. “이런 일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찾아서 다녔는데 아주 잘될 수 있습니다.”

“이야! 그러십시오.” 그리고 축복기도를 해주고 왔는데 일주일 만에

“목사님! 그거 안하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좋은 조건을 왜 안합니까?” “내가 하루 종일 내가 여기 와서 살면 어느 교회를 나가야 되나 다녀봤는데 1시간 거리에 한인교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미국 교회에 가서 무슨 믿음이 지켜지겠습니까? 나는 일평생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아왔는데…. 그런데 여기 와서 신앙 다 잃어버리면 큰일 납니다. 돈 아니라 금 덩어리가 쏟아진다 해도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만두셨습니다. 성전 중심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마지막 노래를 이렇게 부릅니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의 메시야관이 무엇입니까?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고 물었지 않습니까? 그 회복이란 무엇입니까? 다윗, 솔로몬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도 다윗 왕국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시니라.” 여러분! 지금 이스라엘 나라에 국기를 보십시오. 하얀 바탕에 파란 색깔로 별 하나 그린 것입니다. 그 별이 무슨 별입니까? 다윗의 별입니다. “우리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은 영원히 영원히 다윗 시대와 같이 빛나라.” 이 뜻입니다. 그런 엄청난 역사의 인물이 된 다윗의 마지막 소원은 성전 건축이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보시면 모두가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하나님 기준으로 살아온 사람과 세상 기준으로 살아온 사람의 차이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에 가면 너는 세상에서 받을 것을 다 받았다.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있지 않습니까?

워너 메이커 씨는 1800년대 후반 1900년대 초반 이름 높은 사업가였는데 책방 종업원으로 시작해서 1896년 뉴욕에다 미국 최대 백화점을 오픈해서 백화점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1907년에 우리나라에 황성기독교 청년 회관 YMCA는 그가 보내준 돈으로 건축한 것입니다. 대통령이 그를 체신부 장관으로 임명했을 때 한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내가 출석하는 필라델피아교회 주일학교 교사에 방해가 안 되는 조건으로 해주십시오.” 성전 중심입니다.

다윗은 성전 문지기에서 자기 행복을 찾고 지금 마지막 소원으로 “하나님! 다 잃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문지기만 제가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보면 다윗도 죄와 실수가 너무나 많습니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죄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끝까지 그를 붙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열정,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뛰어난 믿음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귀하게 보시고 끝까지 다윗을 붙들어서 영광된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말은 그 시대를 말하는 역사를 남겼습니다.

여러분! 시편 84편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는 고라 자손과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다윗을 끝까지 그렇게 붙들어주셨는가? 그의 마음의 소원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왜 성전을 그렇게 사모했는가? 왜 고라 자손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고 그 후손들은 왜 그렇게 훌륭하게 되었는가? 이 모든 역사의 교훈을 저희들이 잘 깨닫고 그렇게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의 은총이 오늘 예배에 참석한 모두에게 임재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13년 11월 3일 이필재 목사 주일 예배 설교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