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만물상]
2024. 03. 22
김태훈 논설위원
마종기 시인의 대표작 ‘바람의 말’에는 사별한 부부의 애틋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병상의 남자가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이 시를 쪽지에 적어 아내 손에 쥐여 주었다.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 마
(중략)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바람이 되어 아내 곁에 머물겠다는 맹세를 읽은 아내는 남편을 떠나보낸 뒤 시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가 그리울 때면 늘 이 시를 읽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다가도 내 남편은 내 옆에 다시 와 줍니다.
이 시가 내게 살아갈 힘을 줍니다.’
▶숱한 사고 현장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사랑한다’는 문자를 남긴다.
미국에서 9·11 테러 때 무너지는 쌍둥이 빌딩 안에 있던 이들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와 세월호 침몰로 생환하지 못한 이들도
마지막 순간에 사랑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급박한 순간 가족에게 전할 마지막 단어는 ‘사랑’일 수밖에 없다.
▶사랑 중에 남녀의 사랑은 지속 시간이 고작해야 18개월에 불과하다는 연구가 있다.
문정희 시인은 부부가 남녀의 짧은 사랑 이후 오래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인지 알지 못하지만/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끼며/
오도가도 못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라고 시 ‘부부‘에 썼다.
부부 사이를 ‘웬수’로 표현하기도 한다.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지만 웬수는 한 이불 덮고 잔다’는 말도 있다.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사는 게 부부라는 뜻이다.
▶일본 시모노세키 앞바다에서 화학 제품 운반선이 뒤집히는 사고로 안타까운 생명들이 희생됐다.
그 사고로 사망한 선장도 아내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긴박한 순간,
‘여보 사랑해’
단 한 문장에 모든 것을 다 담아야 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던 아내는
‘응, 사랑해요’
‘오늘 노래 교실 간다’
같은 일상 대화로 답했다. 사고 전에도 이런 사소하지만 소중한 문자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어느 조사에서 중년 남자들에게 ‘세상을 떠나게 되면 아내에게 무슨 유언을 남기겠냐’고 물었더니
‘사랑한다’와 ‘미안하다’가 가장 많이 나왔다.
평생을 두고 사랑과 미움, 고마움과 미안함이 중첩되는 관계가 부부 사이 말고 또 있을까.
어떤 인연을 만나 살든 그 끝엔 이별이 있다. 그날이 언제 올지도 알 수 없다.
그러니 ‘사랑한다’는 말을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겠다.
유명을 달리한 분들과 유족을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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