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감동
로마서 12:3~13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서울에 있는 영락교회 처음 창립될 때부터 그 교회에서 수고를 많이 하신 존경받는 장로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에게 아주 예쁜 딸이 한명 있었는데 아버지, 어머니는 자신의 딸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교회 봉사를 잘 가르쳐서 훌륭하게 교육을 시켰습니다. 딸을 위해서 기도도 많이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한 자리에 갔다가 그 딸을 본 어떤 청년이 그 날부터 반해서 따라 나서는 일이 생겼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 청년은 교회를 한 번도 가본 일이 없고 보통 사람 수준이 아닌 망나니 같은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상대라서 한마디로 거절 반응을 보였는데 그 청년은 포기하지 않고 그날부터 3년 6개월을 집요하게 따라다녔습니다. 미국 같으면 그런 경우 경찰에 신고합니다.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리면 체포합니다. 감옥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3년 6개월 만에 딸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이 그렇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저렇게 집요하게 일편단심 나를 좋아한다면 세상에 저 사람만큼 나를 좋아할 사람도 없을 것 같다.’ 그런 감동이 와서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큰 문제가 바로 생겼습니다. 저녁마다 친구들이 몰려와서 술상 차려야 되고 교회 나가는 것은 생각도 못하게 되고 생활이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어휴! 계산 잘못했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딸은 그날부터 집요하게 기도하면서 노력을 했습니다. 마치 자기 남편이 자기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3년 6개월 집요한 노력을 한 것과 똑같이 남편 전도를 위해서 똑같은 노력을 열심히 했더니 몇 년 만에 그 남편도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내 아내가 나의 교회 출석을 소원하고 있는데 기독교라는 것이 참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내가 한번 교회를 가봐야 되겠다.’ 그래서 비로소 교회 출석이 이루어졌고 신앙생활을 아주 잘해서 그 사람을 처음으로 집사 임명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그분은 그 후로도 신앙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장로가 되었습니다. “나는 목사가 못되었지만 내 아들은 목사를 시킬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아들은 지금 목사입니다. 딸도 전도사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과거 생각을 오늘 해보십시오. ‘내가 무슨 감동을 해서 이 사람과 결혼을 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어쨌든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에 일생 최고 중대한 결정을 여러분 자신들이 내려서 결혼한 거 아닙니까? 제가 심방을 가면 심방 간 그 집 주인들을 보고 늘 말합니다. 이런 때 이런 추억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다고 하면서 두 분이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느냐고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재미있게 추억담을 이야기를 합니다. 모두 다 답이 다른데 한 가지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포인트에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마음이 감동하는 바람에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첫눈에 반했습니다. 너무 예쁩니다.” 예뻐서 그 한가지로 마음이 움직여버리니까 포기가 안 되어 결혼했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너무 착해 보여서 ‘이런 착한 사람과 평생 사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결혼한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노래를 너무 잘해서 반했다는 것입니다. 노래 잘하기도 힘들지 않습니까? 또,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별로였는데 우리 아버지가 이 사람을 보더니 관상쟁이였는지 귀가 너무 잘생겼다는 것입니다. 저런 사람은 복 받는다고 해서 귀 때문에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답도 있었습니다. 둘이서 차를 타고 데이트를 하는데 운전을 얼마나 멋지게 하는지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더니 한 손을 핸들을 돌리면서 머리카락이 내려오니까 머리를 젖히는데 정말 멋있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진주차를 하는데 두 번도 안하고 한 번에 들어가서 주차를 하고 내리더니 부지런히 와서 자기 내릴 문을 열어주는데 ‘너무너무 멋지다.’ 그래서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한 번도 차 문을 안 열어준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부부 관계만이 아니고 우리 사회 전체는 피차 감동적인 일의 어떤 교환이 우리에게 삶의 용기를 주고 행복감을 더해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신가? 하나님도 우리를 보고 그렇게 감동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나 자신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어떤 점을 보고 감동하실 것인가?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여기 전도폭발 공부하신 분들은 다 기억나는 대목이 있을 것입니다. 공부하는 중이 이런 것이 나옵니다. 천국 문에서 주님이 나를 보고 질문하십니다. “내가 너의 어떤 점을 보고 내 나라에 너를 들여보내야 되겠느냐? 네가 말해라.”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 들어가려면 자격이 있어야 되는데 네가 나한테 말할 수 있는 어떤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으면 말해봐라.”
내 판단에 하나님이 나의 어떤 점을 보고 감동하실 것인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 22장을 보십시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이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는 일을 보시고 하나님이 감동을 하셔서 하나님의 고백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했기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겼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나타난 아브라함의 의가 무엇인가? 절대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잡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데 그를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라는 자리를 마련해서 그에게 주시지 않습니까?
창세기 41장 38절에 보면 애굽의 왕 바로가 한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어찌 얻을 수 있으리오?” 바로 왕이 요셉을 바라봤을 때 “이 사람은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이다. 이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 감동하셨으니 내가 왕이지만 이를 어찌하리오?” 나라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감동한 요셉에게 다 맡겨주는 내용을 우리가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무엇을 잘해드려야 합니까? 성경에 나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불행하고 억울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주의에서 모든 것을 해석했습니다. 돈에 팔려서 남의 나라 노예 신분이 되었을 때도 성경에 보십시오. 불평 한마디도 안합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는데도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도 안합니다. 내 인생 여정에 일어나는 이 모든 불행한 일들도 하나님이 내 인생에 필요하여서 주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그의 고백에서 넉넉히 반증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5장 5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우리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여기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 가운데서 자기 인생을 들여다보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놓고 잘못을 가려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를 이곳에 보내신 이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당신들을 이용하셔서 오히려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러한 요셉을 보고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드라마 같은 요셉 생애를 그에게 주시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는 그 사람에 대한 모함이나 거짓말을 자꾸 퍼뜨리게 됩니다. 그러면 모함 당한 사람은 억울합니다. 참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잘 견디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양쪽을 다 심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공연한 일에 참견하지 않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아무 생산성 없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점심 사 먹여 가면서 일을 꾸밉니다. 똑똑히 알지도 못하면서 알지도 못하는 정보를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모으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고 구약의 말씀에도, 신약의 말씀에도 그냥 계속된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보고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다윗이 무엇을 잘했기에 그렇게 하나님이 감동 선언을 하셨습니까? 성경에 나옵니다. 다윗은 자기 죄를 회개하는 능력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시편 51편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얼마나 죄가 많은지 어머니가 죄악 중에 나를 출생했고 항상 죄과가 내 앞에 있나이다. 나는 죄를 떠나서 살아본 일이 없나이다. 이렇게 많은 죄가 내게 있나이다. 내 죄과를 내가 아오니 항상 내 죄가 내 앞에 있나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날 때부터 나는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남보다도 영적 감각이 너무나도 훌륭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사모가 너무나 간절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성전에 집을 짓고 사는 참새를 바라볼 때 “너는 얼마나 복이 많아서 하나님의 집에서 매일 먹고 자느냐? 하나님이 그리워서 눈물이 되어 주야로 내 음식이 되는도다.” 이 영적 사모가 다윗보다 훌륭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다윗은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3천명의 군사를 풀어 다윗 죽이기 작전을 하는 바람에 13년 산속으로 돌아다니면서 쫓겨 다녔습니다. 그 사울을 처치해 버릴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자기 손으로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내가 이 다윗을 붙잡고 일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다윗을 세웠고 메시야 탄생이 그의 혈통 가운데 이루어지게 했으며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다윗왕국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노아는 당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방주 준비를 그에게 맡겨 인류 보존의 구원이 그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승천했고, 다니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감동으로 그는 쓰임 받는 사람이 되었고, 신약에 와서 요셉과 마리아는 성경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인정하신 기록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은 로마군인 고넬료가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무엇을 잘해서 그렇습니까?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로마 사람이 유대 나라에 와서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고 구제활동을 열심히 하느냐?” 그래서 하나님이 고넬료의 구제활동과 기도에 감동하셔서 베드로를 그 집에 보내서 이방인 최초의 세례자가 되는 기쁨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또 로마군인 백부장의 믿음은 얼마나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까? 그 사람을 보고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이 선언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중 누구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소원을 그 자리에서 다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지금은 어떠십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예수님은 어떤 요청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많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며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서 나에게 어떻게 하고 있으며 네가 하는 대로 네가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우리가 늘 기도를 드리고 삽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인간의 선한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것인가? “성경에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어떤 어려움을 만날 때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부탁합니까? 기도 생활도 안하는 사람에게 부탁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 분의 기도는 영적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부탁합니다. 영적으로 매우 충만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의 주변에는 원수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사도행전에 나오는 말 내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밥도 먹지 않겠다는 결사대가 40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기록이 없어서 궁금한데 그 사람들이 계속 정말 밥을 안 먹었는지, 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위험에서도 영적으로 충만한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런 충만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바울의 믿음을 보시고 바울을 그렇게 크게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어떤 점을 보고 감동하실 것인가? 나는 무엇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시선이나 마음이 내게 와 있다면 일은 끝났습니다. 이것이 안 되기 때문에 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나 때문에 감동하셨다면 그 이후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가장 훌륭한 길로 인도하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일상 신앙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나에 대해서 오늘 성경말씀은 수십 가지 제목들을 우리에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먼저 여기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려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했다면 오늘 우리들도 아들을 끌고 산으로 올라가야 되겠는가? 삼손이 나실인 서약을 해서 평생 머리를 자르지 않아서 의로움이 되었다면 오늘 우리들도 평생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아야 되는가? 이것은 그 사람들에게 그때 주신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나는 나 나름대로 이 시대에 주어진 각각 다른 은사가 있는데 그것을 활용하면 하나님이 감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성경말씀과 같은 것들이 많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가 훨씬 더 화려해 보이고 권위가 있고 신비스러워 보이고 나는 왜 저런 것이 없나 한탄할 때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들뿐만이 아닙니다. 그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서도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약간의 항변적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해주시면 어떨까요?” 그랬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대답이 바울 고백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가 주는 대로만 살면 된다. 네가 그 정도의 약점은 가지고 있어야 오히려 유익하다. 내 결정이니까 더 이상 그런 기도 하지 마라.” 그래서 그 기도를 그쳤다고 했습니다.
어떤 집사님 한 분이 늘 목사들에게 불만을 말씀하시는 분으로 소문난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분 불만이 나쁜 불만은 아닙니다. 좋은 불만입니다. 이런 불만입니다.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은 목사들 편이다.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종들에게 특별 은사를 얼마나 많이 주시는 약속이 성경에 있는지 나 같은 집사보다도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다 사역자들을 위한 성경말씀이 가득 차 있는데 왜 오늘날 목사들은 그렇게 능력이 없느냐? 예수님 같이 해보라.”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목사들만 있는데도 어떻게 아시고 꼭 나타나십니다. 부동산 중개업자였었는데 영어도 잘하고 일을 잘해서 아주 잘 삽니다. 보통 사람 만나서 이야기할 때도 절반 이상은 영어로 항상 말합니다. “내가 목사가 되었다면 하나님과 담판을 해서라도 능력을 받아 특별히 병든 사람들을 예수님은 다 고쳐주셨는데 제자들에게도 능력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목사들이 잘못해서 그 능력이 없는 것이다. 목사들이 얼마나 답답하냐? 내가 목사라면 하나님 붙들고 천지개벽을 시켜서라도 그런 능력을 받아서 교인들 아픈 사람들 다 고쳐줄 것인데 하나도 못하고 암은 커녕 감기 하나 못 고치고 무엇이냐?”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게 나쁜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들은 그 사람을 안 만나려고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집사와 싸울 수도 없고 힘들어집니다.
그러더니 마침내 “나 이제 못 참겠다. 내가 목사가 되어야 되겠다.” 그래서 신학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주변에 있는 목사들은 긴장하지 않습니까? 저와 한 동네에 살았습니다. “교회 개척해서 로스앤젤레스의 교계와 영적 세계를 뒤집어엎겠다. 목사들 정말 답답하다.” 그러니까 나도 저도 그때 한동네에서 그렇게 개척하니까 ‘아! 이제 교인들 다 빼앗기게 생겼다. 큰일 났다. 저렇게 저분이 강렬한 열정을 가지고 하시니 뭔가 될 거 같다.’ 긴장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3분의 1 사역은 다 병자 고쳐주신 거였는데 목사들이 그런 것도 못하고….” 그러면서 자기가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하는 겁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의 병 고치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가 암이 걸렸습니다. 위를 100 퍼센트 잘라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살은 삐쩍 마르고 새까맣게 되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겁니다. 밥도 못 먹는 것입니다. 겨우 몇 발자국 걸어 다니는 것만도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제가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 얼마나 힘드세요?” 내 손을 붙잡고 우십니다. “목사님! 교만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나는 내가 이렇게 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게 내가 몰랐던 것입니다.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목사님! 당신에 대한 그 간증을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 때 내 설교 차례인데 목사님께 양보할 테니까 목사님이 설교하시겠어요?” “목사님! 그렇게 하시겠어요?” “그러세요.”
그래서 부활절 연합예배에 모든 교인들이 다 모였지 않습니까? 거기서 제가 사회 보고 그분이 설교하셨는데 그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누구인지 아실 것입니다. 나는 평소에 한 생각 때문에 목사가 되었는데 목사 되고나서 보시다시피 제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제가 말도 못하게 교만했는데 이제야 내가 비로소 깨달아서 이제는 내가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이렇게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용서하십시오. 다만 한 가지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이것입니다. 내 일생에 하나님이 가장 나를 기뻐하시는 시간이 있다면 지금일 것입니다. 이제는 내 마음이 본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이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이게 하나님의 감동이라고 오늘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은사가 각각 다르고 이런 사람은 이런 일하고 저런 사람은 저런 일을 하는데 준대로만 해라. 더 이상의 생각은 하지 마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큰일을 한다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내가 하는 일이 적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주신대로만 하라.”
오히려 주님은 작은 일의 충성을 부탁하셨습니다. 사실 세상에 빛을 남긴 사람들은 큰 인물이지만 작은 일을 찾아갔을 때 거기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나사렛 빈민촌을 찾아오셨습니다. 온 나라가 존경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온 나라가 아닙니다. 온 세계입니다. 그는 음악인으로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인데 그 사람이 파이프 오르간 연주한다고 하면 티켓을 구매할 길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이는지 모릅니다. 그는 음악 분야에서도 박사이고 절대 권위의 철학 박사이고 의학 박사이고 신학 박사입니다. 박사 학위가 다섯 개입니다. 온 나라에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작은 일을 찾아 나섭니다. 아프리카 랑바레네 정글 속으로 가서 일평생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흑인들의 건강과 신앙을 돌보는 일로 인생을 마쳐버리지 않습니까? 슈바이처 박사입니다. 온 세계가 다 존경하는 인물인데 보이지도 않는 정글 속에 들어가서 작은 일을 찾아서 행했습니다. 독일에서는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받았습니다.
제가 예일 대학에 연구생으로 초청받아서 갔을 때 가서 들으니까 예일 신학대학에서 제일 인기 있는 화제 인물이 라인홀드 니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학교 출신 목사입니다. 그는 목사이면서도 정치 사상가로 유명해져서 193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그의 정치 철학 자문을 받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지미 카터입니다. 미국에는 할리문이라고 하는 그룹이 있는데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받는 50명이 참여하는 모임이 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이 생각하기를 이 사람은 대통령이 되든가 아니면 그 이상의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될 것으로 모두가 기대하고 소망했는데 그 당시 그는 최고의 말단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디트로이트 변두리 빈민촌 목회를 선택해서 일부로 그곳에 가서 수십 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더 유명해졌습니다. 우리나라 목사 가운데 그분에게 제일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 강원용 목사였습니다. 큰 인물이지만 작은 일을 찾아갈 때 하나님의 감동이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여기 마지막에 뭐라고 말합니까?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아무 능력도 기술도 없지만 열심 하나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든가 헌금 생활을 열심히 하든가 봉사 생활을 열심히 하든가 전도를 열심히 하든가 선교 활동을 열심히 하든가 구제 활동을 열심히 하든가 화해 사역을 열심히 하든가 마치 그 사람이 없으면 빈자리가 커버릴 만큼 자기 은사를 따라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 일이 크던 작던 상관없이 그 열심 하나에 하나님은 감동한다는 이야기를 지금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지금 교회에도 그 교회 다니다가 오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서울에 큰 교회 여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담임 목사님께 가서 허락 받았습니다. “목사님!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강대상에 물 컵 갖다 놓는 거 누가 맡은 사람 있나요? 남이 하는 것을 내가 빼앗을 수는 없고 그거 특별히 맡은 사람이 없다면 그 일을 저한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목사님께서 “하십시오. 사무원이 떠다 놓는가 본데 특별히 맡은 사람은 없습니다. 집사님이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사실 물 한 컵 갖다 놓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고 큰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열정을 가지고 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그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사실 저도 물 컵은 늘 강대상에 갖다 놓지만 물은 거의 마시지 않습니다. 어떨 때 기침이 날 거 같을 때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냥 예비로 떠다 놓는 것이지 설교하면서 제가 물을 잘 마시지는 않습니다. 기침 날까 말까 목이 간질간질 할 때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갖다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은 그 강대상 물을 떠다 놓으면서 좀 미신 같은 일을 하나 하셨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일단 강대상에 바쳐진 그 물을 버리지 않고 집으로 도로 가져갑니다. 그리고 중학생 자기 아들에게 이 물을 마시라고 합니다. 그 일을 항상 한 것입니다. 중학생 아들이 “엄마, 그거 뭐야?” 그러면 “엄마가 너한테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물을 마셔.” 그러니까 이 중학생 아들은 순종 잘하는 아들이니까 엄마가 마시라고 하니까 늘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또 마시다 보니까 버릇이 되어서 “엄마, 물 어디 있어?” 찾기도 했습니다. 이 집사님은 뭐라고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들도 저 강대상에 서서 설교할 수 있는 목사로 만들어주세요.” 그러면서 정성껏 그렇게 약간 미신스럽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중학생인데 지금 중남미 일대 한인교회에서 제일 큰 교회 담임 목사가 그 사람입니다. 그 물 떠다 놓은 어머니, 동생들 다 미국 교회의 교인들입니다. 그 사람은 브라질에 가서 목회를 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를 보러 가끔 미국에 올 거 아닙니까? 올 때마다 설교하라고 합니다. 온 교우들 앞에 자기 간증하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 이 교회에서 이 목사님 돌보고 계시지만 우리 어머니가 나를 중학생 때부터 나를 그렇게 키우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물 먹은 목사입니다.” 그러면서 “그러니 제가 어머니 기도대로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물은 아무 효과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정성에 하나님의 감동이 온 것이다. 작은 일이지만 어떤 사람은 이런 일은 하고 어떤 사람은 저런 일을 하지만 뭐 한 가지를 정성스럽게 해야 한다.” 사람이 생각 잘못해서 ‘아! 이 일이 하나님께 감동이 될 것인가?’ 그래서 훌륭한 일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근심거리를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괜히 경비를 써가면서 그런 것을 만듭니다. 어떤 결과가 나타는지 나중에 보십시오. 나의 무엇을 보시고 하나님이 감동할 것인가? 오늘 그 가이드라인을 오늘 이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예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감동선언을 하고 계시나이다. 어떤 점이 내가 하나님의 감동을 불러올 것인가? 우리 영혼을 들여다보게 하여 주시고 오늘 이 성경말씀이 인도하는 그 방향을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13년 2월 3일 이필재 목사 주일 예배 설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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