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한 행복
마태복음 6:1~4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
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5~7장을 “산상보훈”이라고 신학적으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할 교훈을 설교하신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지금도 여행 코스 가운데 팔복산이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설교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이렇게 시작하고 8장 1절에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봉독해드린 6장에서의 예수님의 교훈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하는 선한 일은 비밀스럽게 하라.” 이렇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드려도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다른 사람이 못 보게 은밀한 중에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고, 보물은 너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에 쌓아두고, 구제는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비밀스럽게 하라.” 이런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본래부터 비밀스럽게 감추어져있고 비밀스럽게 역사함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감추어져있는 비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작업을 “계시”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13장 11절에 예수께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계시를 주는 사람에게만 주는 것이다.” 비밀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선생은 고린도전서 15장 51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그러면서 우리의 모든 부활의 진리를 설교하셨습니다. 복음은 비밀이라고 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밀을 전하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바울 선생도 사람들에게 기도 요청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런데 무슨 기도를 해주시느냐 하면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렇게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골로새 1장 1절에는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가 메시야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지 않습니까?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선한 일을 할 때에는 비밀스럽게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구제할 때 외식하는 자와 같이 거리에 서서 나팔을 불지 말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무슨 문화가 있었느냐 하면 ‘구제를 좀 해야 되겠다.’ 생각하는 사람은 마차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구제품을 많이 싣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장소에 마차를 세우고 구제 마차가 왔다는 신호로 마차 위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면 그 나팔의 의미를 사람들이 금방 알아차리고 구제의 대상자들이 마차 곁으로 몰려들게 됩니다. 그 모여든 사람들에게 구제품을 나누어주는 일이 문화적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터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나 오늘 누가 구제 마차를 마련해 왔다고 다 소문이 금방 퍼지게 되어서 그 사람은 그날로 금방 그 동네에서 의인의 추대를 받고 좋은 일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도 나도 형편만 허락하면 구제 마차를 만들고 한번 멋지게 구제 나팔을 한번 불어야 되겠다는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문화를 보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렇게 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6장에서는 예수님이 여러 가지 종류의 말씀을 하셨는데 한 주제가 끝날 때마다 결론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보상에 대한 약속으로 말씀이 끝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결론도 “네가 만약 내가 시키는 대로 그 구제 활동을 그렇게 비밀스럽게 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절부터는 기도에 대해서 가르쳤는데 기도할 때도 큰 거리의 어귀에 서서 하는 것보다 네 기도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골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기도를 하는지 잠을 자는지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6절에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런 교훈입니다. 더 나아가서 16절부터는 금식문제를 설교하셨는데 “금식할 때 다른 사람이 네가 금식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라. 그러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가 네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갚아주겠다는 약속이 계속 나오는 설교입니다. 그러면 이런 말씀이 효과가 있어야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하는 것이 복된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좋은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의 칭찬과 복을 받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 대접하기를 즐기다가 천사까지 대접해서 심판을 면하게 되었다는 기록도 창세기에 나오고, 고넬료는 로마 군대 장교인데 유대 나라에 와서 구제 활동을 많이 하게 되었더니 천사가 나타나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응답을 받은 기록도 성경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도르가라고 하는 여인이 구제활동을 많이 하다가 죽었는데 온 동네 사람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기도를 해서 그를 다시 살려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으면 그러한 선한 일을 많이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법이 좋아야 한다고 예수님이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우리가 한다는 것이 쉽지 아니한 일인데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서 “이왕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마음이 감동하셔서 하나님이 참지 못하시고 너희에게 무엇을 좀 갚아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복된 일이다.” 이렇게 지금 설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보니까 이렇게 몇 가지로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장날 길거리 모퉁이에 마차 위에서 나팔을 부는 사람들의 목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선한 일을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제가 필요한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은 거의 아닙니다. 오히려 명예 욕구가 가득한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마차를 하나 마련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구제 대상자들을 오히려 이용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선한 일을 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바라볼 때 경이롭게 바라보고 극찬의 말을 받는 것을 목적으로 무엇을 나눠 줍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은 나는 몰래 했는데 혜택자들이 말을 함으로 퍼지는 것입니다. 그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나팔 부는 사람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알리는데 제일의 목적을 삼습니다. 우리 목회자들, 지도자들 가운데도 항상 무언가 마차를 만들기 좋아합니다. ‘이런 마차를 내가 그 위에서 나팔을 불면 어떨까?’ 머리가 항상 그 쪽으로 돕니다. 별 봉사를 하는 일도 없으면서 항상 마차를 구성합니다. “여기를 봐라. 이런 것을 하자.”
이런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이 “저 사람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더 이상 그에게 줄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가 목적한 것이 그 순간에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만 해도 아마 안하는 것보다는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게 갚아줄 것이 없다. 자신의 목적이 이미 나팔 부는 순간 다 이루어진 것이다.”
그 다음에는 보상을 바라고 선한 일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팔 부는 사람들은 나팔 부는 순간 즉시로 보상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바라보는 게 보상입니다. 그 보상을 바라고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보상 문제를 잘못 취급하면 기복신앙, 무당 종교가 됩니다.
여러분은 사랑해본 경험을 다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이라는 그 자체가 너무 좋아서 시작하고 끝나야 합니다. 이 사랑을 물질적으로 계산하기 시작하면 그 사랑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얻은 것이 뭐냐? 무엇을 얻으려고 사랑했느냐?” 여러분! 자식들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왜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이 너무나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효도를 목적으로 삼고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만 두는 게 낫습니다. 본전도 안 나옵니다. 자식 사랑은 주기만 해도 좋아서 내가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것이 보상이지 않습니까? 그래놓고 무슨 효도를 바랍니까? 예수의 사랑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나는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나를 주려 함이니라.” 주기만 해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 선행이란 주는 기쁨을 누리려는 것입니다. 나의 이 작은 선행이 필요한 형제에게 보이지 아니하게 기쁨의 비밀을 선물해줄 때 그것이 아름답다고 예수님이 칭찬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백성은 이 비밀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 영혼 속에 간직한 영적인 기쁨을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아무리 다른 사람이 나를 들여다봐도 현미경으로 찾아보아도 절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 가운데 확실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믿는 자에게는 받은 자 외에 알 사람이 없다는 진리를 성경이 말한 것입니다. 보상을 전혀 기대하지 아니하고 베푸는 사랑은 은혜의 관계가 되고 보상을 바라고 베푸는 사랑은 율법적 관계가 되어서 마차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저런 이름으로 항상 마차를 만들어놓고 사람 많이 모이는 데서 “여기를 봐라!” 나팔을 불어대면서 내용은 아무것도 안합니다. 목사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많아서 무슨 조직을 날마다 하고 냉면 먹고 헤어지는 회의를 일 년 내내 하면서 무엇을 했다고 합니다. 집사님들도 항상 이런 저런 이름의 마차를 만들어놓고 그 위에서 나팔을 불기 좋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지금 이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끔 신문에 보시면 제비족이라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은 날마다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여자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 사랑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치는 순교자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바라볼 때 ‘아! 저 분들은 그 많은 여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단하고 힘이 드시겠는가?’ 존경을 해야 되는데 나쁜 놈들이라고 다 평가합니다. 왜 그럽니까? 사랑이 목적이 아닙니다. 다른 것을 목적하고 사랑을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나쁜 놈들이라고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말 기쁘고 행복한 것은 남이 모를 때 혼자 누리는 비밀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히틀러 정권 때 희생의 제물이 된 본회퍼 목사가 감옥에서 남긴 말은 “내 일평생 중에 지금이 제일 기쁩니다.”였습니다. “아니, 뭐가 그렇게 기쁩니까?” 34살에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가 되었을 때 그를 기억하는 독일의 많은 사람들은 장래 독일을 책임질 이 유망주가 한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비밀경찰에 의해서 이렇게 죽게 되어 안타까워했습니다. “나는 지금이 제일 기쁩니다.” “뭐가 기쁘십니까?” “진리를 위해서 희생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이것은 나만이 갖는 기쁨입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 다음에 보상이 나옵니다. “하늘에서 너의 상이 큼이라.” 핍박을 받는 게 그게 무슨 복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한 행복을 자신이 믿고 있기 때문에 핍박 받을수록 비례하는 기쁨은 커져가는 패러독스 진리입니다.
그러면 선행을 하는 사람들의 하나님의 보상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 기쁨이 큰 것입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자기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남이 안 알아줄수록 좋습니다. 마차 만들어놓고 나팔 불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 잘못 가는 것입니다. 여기 오르가니스트가 주일마다 오르간을 쳐서 찬송가를 부르는데 도움을 주지 않습니까? 저는 이 오르간을 누가 했는지 모릅니다. 제일 기쁜 사람은 이 오르간을 해놓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내가 무엇을 하나 마련했는데 그것이 이 많은 교인들에게 날마다 기쁨을 주는 도구가 되었구나.’ 아무도 모릅니다. 담임목사도 모릅니다. 여기 지금 설교하는 제 얼굴이 스크린에 멋있게 나옵니까? 제일 기쁜 사람은 스크린 만들어 놓은 사람입니다. ‘내가 필요한 도구를 하나 했더니 내가 헌납한 그 물건 속에 나타나는 복음의 진리가 이렇게 주일마다 나오는구나.’ 이게 제일 기쁜 것입니다. 그런 비밀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입니다.
제가 어느 신학교에 가서 졸업식 설교를 했는데 꽃다발을 가지고 신나서 난리를 치는데 제가 설교하면서 모두 봅니다. 저 구석에 어느 아줌마가 처음부터 끝까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시는 겁니다. 얼굴이 흥분을 해서 저는 속으로 ‘내가 설교를 얼마나 잘하면 저렇게 울고 계실까?’ 궁금해졌습니다. 나중에 제가 설교를 했으니까 신학생들이 와서 사진을 찍자고 하는데 그 아줌마와 같이 찍자고 하는 겁니다. “엄마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십니까?” 신학생 세 사람이 왔습니다. 그 아줌마는 미국에 가면 봉제공장이라고 바느질하는 공장이 있습니다. 봉제공장에서 바느질하는 아줌마입니다. 아주 믿음이 좋으십니다. 새벽같이 나가서 그 공장에서 재봉틀에 손을 찔려가면서 바느질을 해서 그 신학생 세 명을 입학 때부터 졸업 때까지 등록금을 후원해준 아줌마입니다. “나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가난한 신학생 세 명을 제가 입학 때부터 등록금을 후원해주었습니다. 오늘 졸업식이 되니까 내가 너무너무 기뻐서 계속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만 가지고 있는 기쁨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저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사진 찍자고 하는 바람에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 스트라우스가 왈츠 곡을 작곡해서 유명해졌는데 세월이 흘러서 할아버지가 되어서 어느 날 어느 장소에 가보니까 수천 명이 모여서 자기가 작곡한 노래를 부르면서 즐겁게 왈츠 곡에 맞춰 춤들을 추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노인이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아! 내 작곡을 저 사람들이 저렇게 즐기는구나.” “영감님! 왜 우세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같이 추시죠!” “아니에요. 나는 춤출 줄 몰라요. 여러분이나 추십시오.” 사람들이 파티가 끝나고 모두 자리를 떠났는데도 혼자만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더 큰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큰일을 맡기겠노라.” 그런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참지 못하십니다. “아! 내가 너와 일 좀 더 해야 되겠다.” 그래서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라고 했지 않습니까? 선행은 내가 하여도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되는 진리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서 선행을 한 그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그냥 사마리아 사람이라고만 밝혀있습니다. 또, 만약 그 사람이 여리고 산모퉁이에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는 곳에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장터에서 많은 사람이 피 흘리고 쓰러졌을 때 어떻게 되었을까요? 서로 저마다 이 사람을 위한 선행을 내가 해야 되겠다고 끌어안았을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아무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더 기쁜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어떤 때 하나님과 나만 아는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용서 받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도 하나님과 나만 알게 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 백성의 특권입니다. “네가 남에게 비밀한 사랑을 줄 수 있는 하나님 백성의 특권을 네가 누려라. 마차 만들어놓고 나팔 불면서 이리 모여. 뭐 줄게. 하지 말라. 너는 왜 마차만 만드느냐?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여러분! 갈보리교회 교인들이 선교지에 건축한 교회가 현재로 146개입니다. 우물도 이제 75개째 완성되는데 한 번도 내가 여러분 앞에 “이 교회는 누가 헌금해서 지었습니다.” 광고 안했습니다. 하나님이 갚으시라고 안한 것입니다.
저는 아쉬운 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목사였다면 참 좋았을 것을….’ 아버지가 목사님이셨던 목사는 아주 할 말이 많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내용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훌륭하게 목회하신 부분들 말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들은 아버지 이야기만 설교 가운데 꺼내면 아주 은혜를 받아서 할 재료가 무궁무진합니다. 평생 보아온 아버지의 선한 모습을 표현할 때는 교인들이 다 웁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내가 전도해서 예수 믿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 어른이 내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 제가 참 힘들었습니다. 아버지 전도하려고 기도도 보통 많이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목사이셨던 목사들은 모여서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면 눈물이 글썽글썽해지고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평생 가도 아버지 이야기를 꺼낼 게 없습니다. 제 친구 목사 하나가 아버지가 목사이셨는데 1950년대 6·25 동란 이후에 극심한 식량난으로 먹을 게 없잖아요? 그런데 이 가족은 목사님이 산아제한을 하셔서 자녀를 8명밖에 안 낳으셨다고 합니다.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시골에서 목회하는데 식사 때마다 고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유일한 기쁨이 하나 있었답니다. 제 친구 목사가 이야기한 것입니다. 누군지 모르는데 일주일에 한번 한 10개 정도 계란을 봉지에 넣어서 사택 문 앞에 갖다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모님이 그것을 가져가 8식구가 영양 보충으로 하루에 한 두 개씩 쪄서 집안 식구들이 계란찜 먹는 기분에 자기도 아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양보충을 하고 살았는데 목사님은 이렇게 도와주시는 분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분이 누구실까? 먹기는 먹어도 누군가? 저마다 먹고 싶을 텐데 누구지?’ 일주일이면 꼭 10개씩 어느 순간에 갖다 놓는다고 합니다. ‘어휴!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 잡아내야지.’ 문 앞을 지켰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 틈에 갖다놓아서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새벽인지 밤중인지 틀림없이 그 자리에 있는데 그 시절에는 CCTV가 없었으니까 잡기가 힘들었답니다. 그런데 마침내 목사님이 밤잠을 안자고 일주일동안 지켜서 선한 범인을 잡았다고 합니다. “집사님이셨군요. 난 너무너무 궁금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이 감격하셔서 “집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 집사님은 가난하게 사는데 닭 몇 마리를 길러서 그들이 낳는 알을 모두 가난한 목사님 가정에 드린 것입니다. “집사님! 감사합니다.” 그래서 막 붙들고 울고 인사드렸는데 큰 문제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 이튿날부터 안 가져오시는 겁니다. ‘어휴! 이 작은 일을 하면서 내가 무슨 나팔 불 일이라고…. 이제 목사님께서 알아버리셨으니 이 일은 그만 하자!’ 그래서 자기 기억에 그 사건 때문에 어머니한테 아버지가 날마다 들볶였다고 합니다. “왜 그분을 잡아내서 먹지도 못하게 합니까?”
여러분! 비밀스럽게 하는 사람은 그냥 두십시오. 그 기쁨을 빼앗지 마십시오. 그리고 별일도 아닌데 날마다 마차 만들어놓고 뛰어올라가서 나팔 불지 마십시오. 주님은 그때 시장 어귀에 서서 “내가 이런 마차를 만들었으니까 이리 와!” 나팔을 불고 얼굴을 휘저으면서 “내가 이런 사람이야.” 그런 것을 하지 마십시오. “저것은 오히려 구제 대상자들의 자존심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하나님만 아시는 선한 일의 기쁨을 가지십시오. 여러분! 이런 설교가 효과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마음을 먹고 지키려고 할 때 그것이 경건의 능력이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뭐 하러 이렇게 긴 설교를 듣습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가르쳐주신 진리를 기억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름을 따서 항상 마차를 만들어놓고 올라서서 나팔 불기 좋아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서 하나님이 갚아주심의 축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12년 11월 4일 이필재 목사 주일 예배 설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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