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보리교회 외/갈보리교회 이필재목사 설교

불로 연단한 믿음

산넘고 물건너 2012. 7. 14. 19:12

 

 

 

불로 연단한 믿음

베드로전서 1:1~7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금년 교회 표어가 “교인에서 신자로, 신자에서 제자로” 제자화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또다시 6개월 동안 후반기 삶을 살아가는데 이런 표어가 효과가 있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구약 최초의 제자와 신약의 최초의 제자들을 조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신학자들이 조명해보는 유대 종교의 시작은 아브라함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 민족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늘 말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그 민족의 계보가 자세히 나와 있는데 1절에 말하기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었는데 그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서 제일 먼저 최초의 제자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 하나님 역사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제일 먼저 주신 것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나그네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가 127세를 살고 가나안 땅에서 죽었을 때 남편인 아브라함이 매장지가 없어서 헷 족속들에게 가서 하는 말이 “나는 이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요 청컨대 당신들 중에 내게 매장지를 주어 나로 내 아내를 장사하게 하소서.” 은 400세겔의 돈을 주고 막벨라 굴을 사서 아내를 장사 지내는 나그네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나그네 한 사람을 데리고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로부터 수천 년이 지난 일인데 하나님은 이때에도 변함없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기아에 흩어진 나그네” 그들과 함께 일하고 계신다는 베드로의 고백서를 지금 읽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역사에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다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나그네로 살았고, 야곱도 나그네로 살았고, 요셉도 17세 이후 110세 되기까지 애굽의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 택한 백성을 디아스포라, 흩어지는 백성들이라고 했습니다. 바벨로니아와 앗시리아와 온 세계에 가장 많이 흩어진 백성들입니다. 지금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에 500만, 귀화한 아랍계 80만 합쳐서 580만이 살고 있는데 본국 숫자보다 외국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나그네로 삼는 이유는 “온 세상에 흩어지라. 그리고 내가 너희들에게 선물한 이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세계인에게 나누어주어라.”라는 사명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흩어지라.” 역사를 보면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영국인을 온 세계에 흩어서 우리나라도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가 영국에서 왔습니다. 지나간 200년 동안 미국인을 선교사로 온 세계로 흩어놓으시고 지금은 대한민국을 온 세계에 흩어놓으셨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 백성들 700만 정도가 온 세계에 디아스포라 되어서 한국인이 있는 곳에 교회가 세워지도록 하나님이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이 이렇게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리 국민이 과거 역사에 극심한 고난 민족이었다는 것이 지금 쓰임을 받는 이유입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셨던 민족이나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불로 연단해서 그 다음에 쓰셨습니다.

한 역사학자가 자신의 역사철학을 발표를 했는데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을 민족 단위로 연구했을 때 가장 많은 고난을 겪은 민족이 어디냐? 바로 유대인입니다. 전 세계 역사학자는 100% 똑같이 인정합니다.

우리 기독교를 대표하는 상징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고난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요 고난을 지고 올 것이니라.”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말 가운데 이 십자가는 문화화 되었습니다. 어떤 고난을 당할 때 “나는 건강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저는 물질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족도 십자가일 때가 있고 내 자신의 삶도 십자가일 때가 있습니다.

1892년 11월 시카고 맥콜래 신학교를 졸업한 윌리엄 스왈른(William L. Swallen)이 한국에 선교사로 나왔는데 한국말을 열심히 배웠고 48년 동안 이 땅에서 선교사를 했는데 그가 이해한 한국 조선인의 모습은 “고난의 민족이다. 이 민족들에게 정말로 은혜가 될 수 있는 찬송가를 하나 내가 기도하고 만들었으면 좋겠다.” 우리 민족을 대상으로 찬송가 하나를 지었습니다. 거기에다 존 더글러스 스코트(John Douglas Scott)라고 하는 사람이 곡을 붙였더니 한국 사람들이 그 찬송 때문에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는지 아마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부른 찬송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 찬송가가 바로 “하늘가는 밝은 길이”입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나의 지상의  

   이 어둔 그늘을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내가 걱정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데  속의 극심 밖의 걱정 늘 시험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내가 천성 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가 쉴 맘 있도다.”

세상에 소망이 없습니다. 이 찬송가를 그가 지어냈더니 얼마나 사람들이 은혜롭게 부르는지 눈물을 흘려가며 부릅니다. 지금도 우리가 장례식에는 가장 많이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대한민국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은 어쩌다가 세계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국가적 이권 개입 때문에 힘없는 나라 백성들은 온갖 고통의 눈물을 흘리면서 굶주림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언어도 고난이 반영된 언어문화입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인사합니다. “지난 밤에도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인사하는 것은 밤에 두들겨 맞고 도망가야 되는데 걱정스러워 인사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인사하는 사람이 없어졌는데 제가 청년시절만 해도 동네에서 어른을 만나면 “식사하셨습니까?” 하고 인사했습니다. 남이 밥 먹은 것을 뭐 하러 물어봅니까? 식사도 못하는 사회이니까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그때부터 어쩔 수 없이 희망이 있는 곳이라면 찾아서는 용기가 생겨서 고종황제 때 1903년부터 희망을 찾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디아스포라,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 항구에 내린 것이 1885년 4월 5일인데 그가 이 땅에 와서 이 땅을 살펴보고 첫 번째 기도문 쓴 것을 선교부에 보고한 것이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어볼 테니 들어보십시오. 

 “주님! 이 땅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

  하고 있는 땅입니다. 내가 어떻게 그 넓은 태평양을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주께서 나를 붙잡

  아 마치 이 땅에 떨어뜨려 놓은 한 느낌입니다. 지금은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

  입니다. 가난과 어둠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이들은 왜 묶여 있는 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사람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하고 화부터 냅

  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정부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

  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해야 할 일도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주님! 그러나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끝까지 이 땅에 나를 보내신 사명을 순종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이들

  의 영적인 눈이 앞날을 볼 수 있을 것을 나는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

  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조선인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또, 지금은 우리가 이들에게 듣는 말이 ‘서양

  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오리라고 믿나이다. 학교도 없이 교육 없이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하나님의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으면서 제게

  주신 사명을 끝까지 지키겠나이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게 오늘입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가면 그의 동상이 서있는데 복음과 교육을 이 땅에 심어준 사람입니다. 어둠의 세계에 빛을 던진 자, 알렌 의사가 이 땅에 찾아옴으로 병원 문화가 생겨서 질병에서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이번 10월에 알렌 의사를 우리나라에 파송해준 미국 교회를 방문하도록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이러한 사실에 대한 영적 관찰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흩어진 백성들을 통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 일이다.” 여러분! 이민을 가셔서 살아보셨습니까? 미국 같이 앞서가는 나라에 이민을 가도 이민자들은 모든 환란과 고난 속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막심한 고생들을 해야 합니다. 지금 아시아의 흩어진 이 나그네들은 남의 나라에 가서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 마음 놓고 섬길 수 있으리라고 하는 예루살렘의 핍박을 위해 흩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6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나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면 고난은 오히려 기쁨이 될 것이다. 네 믿음에 관계된 것이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키는 인물이 된 것의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꿈이었습니다. 아주 선명하게 꿈을 꾸었습니다. 사탄의 대장이 부하들에게 “너희는 가서 이 땅에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전멸시키라. 방법은 너희 마음대로 해라.” 그래서 부하들을 보냈는데 다 돌아다닌 다음에 세 사탄의 부하들이 대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왔습니다.

첫 번째 부하에게 “너는 어떻게 했느냐?” “대장님! 사막을 걸어가는 예수쟁이들에게 나는 잡혀 먹히라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겁이 나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순교를 당할 수 있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오히려 믿음이 더 좋아졌습니다.” “실패했구나.

둘째는?” “저는 바다를 항해하는 예수꾼들에게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갑판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을 찾고 밤새도록 끊이지 않는 기도를 드리고 주님을 더 의지합니다.” “너도 실패했구나.

셋째는?” “저는 세상에 내려가서 가난한 교인들을 찾아가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주었습니다. 돈과 건강과 성공과 모든 것을 다 가지라고 베풀었더니 10년이 되니까 그들의 영혼은 완전히 썩어버렸습니다.” “너는 성공했구나.” 꿈을 깬 루터는 이게 하나님이 주신 영적 사인이라고 생각하고 고난의 길을 택해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따뜻한 봄에 보면 아지랑이가 아물거리고 산천에 개나리 진달래가 피고 고요한 계절에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싹이 나서 막 자라기 시작할 때가 되면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꽃샘추위라는 시련이 다가옵니다. 새싹은 나오자마자 고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 새싹은 살아남기 위해서 땅 속으로 뿌리를 깊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여름이 가까이 오면서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서 나무뿌리마저도 뽑혀질 정도로 폭풍우가 되는가 하면 호박잎이 구멍이 뚫릴 만큼 우박과 강한 소나기가 쏟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곡식은 살아남기 위해서 그 숱한 핍박을 억세게 견디어 내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그들의 몸은 매우 튼튼해져서 이제는 어떤 악성 기후 조건에도 견딜만한 체력으로 채소들이 자랍니다. 그럴 때가 되면 바람과 비는 서서히 물러가고 따뜻한 초가을의 고요한 가을 햇살이 비치게 되고 그때 그들의 몸에서는 진주 같은 열매를 탄생시켜서 인간 생명의 절대적 도움을 주는 일을 끝내고 자기 사명을 완수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농사짓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설교에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6~7절 말씀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영광과 칭찬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5장 3~4절에 똑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제자들은 고난을 받아들입니다. 나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는 진리가 성경에 나옵니다.

 

지금은 동네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시골 아이들이 제일 반가워하는 사람들이 동네에 얼마 만에 나타납니다. 이 사람만 나타나면 온 동네 아이들이 흥분하고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바로 엿장수입니다. 철컥철컥 쇠가위를 움직이면서 그 엿장수들이 외우는 노래가 있는데 마치 우리가 사도신경을 외우는 것처럼 외웁니다. “뭐 가져오고 뭐 가져오고 뭐 가져와라. 꿀 맛 같은 엿을 주리라.” 하면 동네 아이들이 흥분하는데 제가 어렸을 때는 돌아다니면 수확이 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 때 쇠붙이들이 산천에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쇠붙이를 가지고 가면 얼마나 엿을 잘 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쇠붙이를 갖다 주면 엿장수들은 그 못쓰게 된 쇠붙이들을 대장간으로 가지고 갑니다. 그래서 근 수를 달아서 돈을 받는 직업 아닙니까? 그런데 그 대장간 주인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그 들판에 널려있는 그 쇠들을 풀무불 구덩이에 집어넣고 풀무질을 해서 쇠를 다 녹입니다. 거의 다 녹았을 때 집게로 끄집어내서 쇠판에 올려놓고 망치로 때리기 시작합니다. 이 쇠붙이는 온갖 고통을 다 당합니다. 두들겨 맞고 불 속에 들어갑니다. 장단을 맞추어 때리는데 작은 망치로 뚝딱뚝딱 때리면 옆에서 큰 해머 같은 것을 들고 청년이 때리라 하는 곳을 때리면 그 쇠가 다 뭉글뭉글해지면서 연장이 됩니다. 호미도 만들어내고 괭이도 만들어내고 낫도 만들어냅니다. 그런 다음에 그 쓸모없이 버려진 쇠붙이들은 농민들에게 요긴한 농기구가 되어서 생산에 도움을 주는 기구들로 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지막에 그것을 때려서 그 뜨거운 쇠를 마지막 연단으로 물에 담가야 합니다. 김을 내면서 담갔다 꺼내면 쇠가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장을 만들어서 쓰는 것입니다. 지금은 기계화 되어서 그런 것이 다 필요 없지만 옛날에는 모두 그렇게 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쇠붙이처럼 산천에 널려져서 아무 쓸모없는 우리들을 다 집어다가 성령의 불 속에 집어넣고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만들어서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가 지금 쓰임을 받고 있는 것을 깨닫는 것을 알고 현재 고난을 참고 견뎌야 합니다.

제자는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고난 없이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겠느냐? 십자가를 보라. 예수의 고난을 통해서 인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느냐?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은 무엇이냐? 평안하고 안일한 것은 아니다. 제자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십자가를 지지 않은 사람은 내 제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제자가 어려운 것입니다. 교인 생활은 쉽습니다. 왔다 가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닥칠 때 과연 그 고난을 무릅쓰고 ‘이 십자가를 내가 질 것인가?’ 교회를 건축할 때 담보 서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교인들에게 담보서실 분 계십니까? 교회가 잘못되면 당신의 재산은 모두 손실될 수 있습니다. 이게 십자가입니다. 재산이 손실되더라도 내가 교회를 위해서 이런 십자가를 한번 졌다는데 대한 자부심과 기쁨이 있는 사람만 나서십시오.” 그래서 했습니다. ‘이러다가 교회 다니다가 괜히 집안 망하겠다.’ 못합니다. 십자가는 그런 것입니다. 지금 미국의 우리 '말씀의 집'도 제 이름으로 은행에서 200만 달러에 얻었지 않습니까? 내가 그 교인들, 목사 만나서 “이게 내 십자가이다. 만약 잘못하면 나는 200만의 빚을 지게 된다. 내가 사인하고 내가 얻었다. 그래서 내가 산 것이다. 내가 이제 은퇴해야 하니까 누가 대신해서 이 십자가를 지실 분 계십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 보십시오. 말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쉽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렵지 않느냐? 아무도 못하지 않느냐? 내가 하고 가서 이것을 산 것이다.”

십자가는 어렵습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 주님을 위해서 내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다 도망간 것입니다. 여러분과 만난 지 제가 10년인데 제 바람은 우리 갈보리 교인들이 모두 제자화 되는 것입니다. 이왕 예수 믿는 것,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로마에 가서 카타콤을 구경했지 않습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로마에 핍박이 일어나니까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지하 무덤을 파고 전부 들어갔지 않습니까? 지하 무덤이 1~3층으로 되어 있는데 총 길이가 900km입니다. 여기서 부산이 420km입니다. 들어가 보면 개미굴 같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곳으로 들어가서 살았지 않습니까? 거기서 죽어서 그곳이 다 무덤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거기서 출산해서 햇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이 수만 명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았습니까?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 로마가 뒤집어엎어져서 복음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이때 우리가 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잡혀서 원형 극장에 끌려가서 마치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과 똑같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을 야구 구경하듯 구경하지만 그래도 좋다. 그러나 오늘의 이 제자들의 고난스러운 삶이 결국은 로마를 뒤집어엎을 것이다.” 그들은 이름 없이 다 그렇게 죽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뒤집혔습니다.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이다.” 그래서 바티칸이 생기고 교황청이라는 것이 로마 복판에 지금까지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십자가를 져야,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게 제자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내가 그 십자가를 지겠나이다. 죽음으로 지겠나이다.” 그 사람들 때문에 기독교 진리가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토마스가 대동강에 올라오자마자 박규수가 목을 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젊은 나이에 나는 여기 와서 피 흘려 죽지만 그러나 이 피 값은 장래 대한민국에 복음의 확산이 이루어질 것이다.” 기쁘게 죽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누군가는 피 흘려야, 누군가는 희생해야 합니다. 그 자리를 내가 간다고 하는 것이 제자란 말입니다. 로마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번 이렇게 계산해보면 몇 백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 굶어죽고, 핍박받아 죽었지만 지금 로마는 그들 때문에 먹고 삽니다. 왜? 그 카타콤을 구경하러 관광 오는 사람들로 일 년에 관광수입이 수천억입니다.

핍박 시대의 성도들의 믿음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하나의 소망을 생각하고 희생을 합니다. 평온할 때 성도들은 이기주의자들이 됩니다. 교회 다니면서 자신의 어떤 요청이 들어주지 않을 때는 이기적으로 돌변해버리고 맙니다.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 사명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고 자신의 요청의 요구만이 이기주의로 변하는 그런 마음들을 가지고 산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고난당하는 형제들에게 역설적 진리를 이렇게 설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핍박당해 쫓겨 가서 죽는데 무슨 노래가 나오겠습니까? “노래하라. 당신들의 그 핍박은 썩지 아니하고 더럽지 아니하는 하늘의 소망이 우리에게 있으니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노래하라.”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란 뭔가? 삶의 목적을 하늘나라에 두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살든지 죽든지” 살아도 괜찮고 죽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대로” 이게 제자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나그네가 된 최초의 신약시대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하고 최초의 구약의 제자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가서 아내가 죽어도 묻을 장소가 없어서 헷 족속에 사정을 하면서 “이 시체를 묻게 해주소서.” 그들을 통해서 세계는 지금 구원을 받는 진리가 전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기주의자가 되지 마시고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제자란 어떤 것인가? 오직 삶의 목적을 주님께 두고 그 목적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대로 살아가는 사역자, 그렇게 살아준 수없이 많은 제자들 때문에 오늘 내가 주님의 제자가 또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것을 생각하면서 오늘 현실에서 제자의 삶을 결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12년 7월 8일 이필재 목사 주일 예배 설교 내용』